<현장 기고>
서울지하철노조 선거 평가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생존권 사수투쟁의 서막을 열다.
서울지하철 노조의 제 12대 집행부 선거가 3월 17-19일 조합원 투표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99년 지하철 총파업 이후 등장한 어용세력인 배일도 집행부의 장기집권에 맞서 민주파 후보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번 선거승리는 민주진영 활동가들의 주체적인 활동에 의해 쟁취했다기 보다는 공사의 구조조정, 그리고 배일도 집행부의 끝없는 현장침탈에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현장조합원들의 절박한 정서가 반영된 조건반사적인 승리라 할 수 있다.
공사는 작년 초 새로운 신임사장을 맞이하면서 공세적인 구조조정을 준비했다.
일명 '흑자경영계획'이라는 구조조정은
△06년까지 2,773명 감원
△인원 충원 없는 주5일제 실시
△성과급 중심의 인사제도 확립
△분사 및 외주용역 도입
△업무다각화와 역사 리모델링 실시 등의 내용을 담아서 현장조합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편승하여 배일도 집행부는 03년 하반기에 개악된 주5일제 근무형태안을 제시하였고, 공사의 흑자경영계획에 노동조합이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서('21세기 지하철 발전 협약서')를 밀실에서 합의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흐름이 결국 '21c협약서'를 부결시켰으며 제 12대 집행부선거에 허섭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생존권에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지하철 노동자들에게는 '배일도 반대, 민주집행부 건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만연된 개량주의 흐름
4년이라는 배일도 집행부 체제에서 민주진영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개량주의 운동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면서 당당한 노동자운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 나아가 썩어빠진 부르조아 정치를 흉내 내면서 민주노조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거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진영 내 예비 후보였던 허섭, 최종진(이상 차량), 김영후, 김경도(이상 역무), 김명기(승무) 후보들 사이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과연 민주노조란 무엇이었던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배일도에 맞서 하나가 돼야 한다.'는 후보단일화 주장은 그 선한 의도를 넘어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선거과정을 통해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후보가 단일화되는 과정에 불필요한 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투쟁의 전략, 전술 논의는 사장되었다.
게다가 부르조아 정치에서 흔히 이용되었던 인기선호도조사인 여론조사를 후보단일화과정에서 도입하였다. 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의 내용을 충분히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면서 '저 후보와 나는 틀리다'는 식의 자의적인 주장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는 선거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건강한 기풍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당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부르조아 정치의 축소판을 보여준 꼴이 되었다.
이는 지하철에 외형적으로는 민주노조가 들어섰지만 아직까지 지하철 현장 내에 그리고 활동가들 사이에는 청산해야 할 노사협조의 잔재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을 새롭게 세워내야 한다.
허섭 후보가 승리하면서 일단 지하철에서는 노사협조주의 세력의 기하급수적인 확장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민주파에 대한 조합원의 적극적인 지지와 신뢰의 표현이 아니다. 사측과 배일도 집행부의 구조조정 강행의지에 따른 고용불안, 노동조건 악화에 대한 불안과 반발 심리적인 성격이 크다.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은 진짜 '한 일이 없다'. 그저 과거의 명망성에 기대어 선거 때가 되자 선거 철새처럼 모여서 '후보가 누가 될 것인가'에만 골몰했다. 전형적인 선거주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현장투쟁의 조직화는 방기한 채 위원장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은 이후 상층부 교섭을 통해서 현장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노자 협조주의적, 관료주의적 행태가 나타날 가능성을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한 현장에서의 대책이 필요하다. 99년 지하철 총파업 이후 현장 조합원들은 패배주의에 휩싸여 소위 '민주'를 버리고 '무파업'과 '실리'를 부르짖은 배일도 위원장을 선택하였다. 그러다가 생존권 박탈이라는 두려움에 현장조합원들은 배일도를 버림으로써 다시 '민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현장 조합원들은 생존의 권리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자신 있는 지도부를 갈망하고 있다. 현장조합원들은 자신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 허섭이라는 민주집행부를 탄생시켰다.
이제 그 공은 지하철 활동가들에게 넘어왔다. 민주집행부가 허울만의 민주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민주노조 건설에 박차를 다해야 한다.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관료주의 흐름을 하루아침에 뿌리 뽑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 내용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 과정은 투쟁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들의 조직적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현재까지의 명망가 중심의 운동을 극복하고 투쟁을 매개로 모든 세력이 재결집해야 한다. 관성적이며 보여주기식의 투쟁을 거부하고,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끈질긴 신념으로 결합하여 조합원 대중들에게 투쟁의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현 시기 지하철 활동가들이 하지 않으면 안될 민주노조 운동의 기풍을 새롭게 세워내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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