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고>
철도노조 선거 평가
철도의 각급(본조합 - 9개지방본부 - 지부) 임원 임기는 3년이다. 3월초부터 지부선거(지부장, 지부대의원)에서 출발하여 지방본부, 본조합 순으로 치러지는데 5월 중순까지 실행되고 첫 대의원 대회까지 3개월이 소요된다. 위원장만의 조기선거는 6·28파업 패배 이후, 이완되고 침체된 현장을 극복하고, 철도 공사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추진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막아 생존권을 사수해야 한다는 절박함, 새로운 체제하에서 특별단체교섭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었다 천환규 위원장은 석방되었으나, 실추된 지도력, 현장의 불신으로 인해 거센 사퇴압력을 받아 자진 사퇴하였다. 물론 주변의 일부는 자리보전을 요구했으나, 3, 4개월 정도의 잔여 임기마저도 채울 수 없었다. 그만큼 현장의 구석구석까지 철도청은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었고, 조합원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아울러 조합에 대한 불신과 냉소마저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1월 중순에 실시한 조기총선 가부를 묻는 조합원 총투표에서 현장 조합원들은 높은 투표율과 찬성율을 보여주었다. 조기총선을 반대하는 자들의 명분은 "조기선거만 치르면 조직력이 자연 복원되느냐?"였지만 20919명 중 18009명이 투표에 참석하였고(89.09%),찬성 13589명(75.46%), 반대 4065명의 결과가 반대 명분을 잠재웠고, 위원장 선거에 돌입하게 되었다.
조합원은 급변하는 환경과 생존권 위협 앞에 결국 쥐어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는 조합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선거논의는 현장조직이 주도하였다. 실패한 천환규 집행부의 다수파인 통일단결회(이하 '통단'이라 부른다)는 '민주세력의 집결과 단결'을 주장하며 철도노동자회, 현장회에 범단일 후보를 제안하였다. 만남은 형식적으로 이뤄졌고, 명분 축적용 이상이 아니었다. 통단은 심리적으로 직접 나서는데 부담이 있었고, 공식입장으로 선거 불개입을 밝혔다. 정확히 집행부의 프리미엄을 활용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철도청의 지원을 받는 강력하고 세련된 어용 후보의 등장을 명분으로 '범민주후보' 선출을 말했고, 조합의 단위 지부장들을 선거판으로 집결시켰다. 범민주 후보 단일화를 준비하자는 자리에서 몇몇 지부장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위기감 조성은 곧 민주후보 선본을 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선거 승리를 목적으로 과거 조합의 투쟁에 함께 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 지부장들의 참여를 허용했고, 선거기간 내내 구설수에 올랐다.
소수파인 현장회는 "선거에 개입하여 2004 투쟁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이유로 '현재 벌어지는 구조조정에 맞선 공동투쟁본부의 구성과 투쟁 현장의 확대'를 조건으로 철노회와 선거연합을 택하였다. 철노회와 현장회의 전병배 선본은 '배신하지 않는 집행부, 약속은 지킨다'라는 현 집행부를 비판하는 슬로건을 가지고 선거에 돌입하였다. 전병배 후보의 선출 자리에서 철노회는 현장회의 공투본 구성과 현장투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미리 준비된 구상을 토대로 신속하게 선본을 구성하였다.
이창환 후보는 집행부의 실패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일 년의 투쟁 계획을 세우고, 파업을 위한 파업이 조합원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냐며 '합리적 대안'을 외쳤다. 그는 철민추를 만들 당시 한 주체였던 철발연의 대표였으며 시민 단체적 운동관을 가진 나름의 인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기관차지부장협의회(전기협)에서 목소리를 키우던 실리주의자들, 철도청, 구 어용세력들이 지지세를 형성했다.
김영훈 집행부측 후보는 애초 "이창환 후보는 철도청후보"임을 외쳤고, "전병배 후보는 급진파, 모험주의"로 모는 전략으로 자신의 표를 관리하였다. 또한 조직력과 공적 조직을 통한 선거관리로 전 집행부의 평가를 얼버무리며 "공사화의 주도"를 다른 축의 전략으로 삼았다. 취약한 조직력을 가졌기 때문에 발로 뛰어야 하는 전병배 후보는 처음부터 강성후보로 인식되었다.
공무원 상태, 상대적으로 낮은 노동자 의식을 가진 조합원,- 파업참여율을 보면 드러난다.-들 속에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행부의 오류와 배반을 조합원들에게 설득하고 엄중한 현실을 설명하는데 실패하였다.
공사 전환 시 철도청의 추진안 - 등급구조, 혹은 임금안 등 - 의 고급정보를 활용하지 못하였고, 공투본의 현장투쟁을 통한 선거 전략은 실패하였다. 충분히 예견되기는 하였으나 공투본은 선거를 위한 형식적 조직으로 전락하였고, 선거운동원들 만의 선거운동에 그치고 말았다. 전반전인 '강성 이미지'의 장점을 충분히 호소하지 못한 셈이다.
1차가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놀랐다. 이창환 후보는 구어용, 실리파 등 철도청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다. 전병배, 김영훈의 대결로 결선에 갈 거라던 예상 구도가 허물어지자 전병배 후보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김영훈 지지를 선언하였다. 결선 투표는 철도청의 엄청난 개입 하에 이루어졌다. 이창환 후보는 자신의 1차 지지율을 내세우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철도청 후보라는 것은 흑색선전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철도청이 온건한 이창환을 선호하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이창환 후보의 해명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영훈 후보는 50%를 겨우 넘기며 힘겹게 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 높은 투표율에 철도청의 개입이 일조를 했다하더라도 전국사업장이라는 투표여건을 고려한다면 조합에 거는 조합원의 기대를 가늠할 수 있다. 1차 전병배, 2차 김영훈에 대한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직종과 분야가 외주화, 인력감축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임은 이를 잘 반영한다. 직선제 쟁취투쟁에서부터 두 차례의 파업 투쟁 등 숨 가쁜 경험을 한 조합원들은 구 집행부(우익 노동조합주의자)의 설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반면에 실리, 합리를 가장 한 사측 후보의 등장은 철도노조의 상황이 여느 사업장과 다르지 않게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철도 노동자는 투쟁속에서 조합을 변화시키고 강화시켜 왔다. 그러나 책임지지 못하고, 조합원의 투쟁에 화답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실리, 합리주의자의 창궐'에 명분을 준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투쟁보다는 '거래적 합의'가 선호되어 온 공공부문의 노조에서 소수인 현장파는 항상 '연합, 반 어용'을 강제 받고 그 무게에 짓눌린다. 더구나 머리수 다툼인 선거에서는 확실히 설자리를 잃곤 한다. 그럼에도 공공부분이, 특히 철도사업장이 처한 현실은 가능성을 닫아두지 않았다. 오히려 위협적으로 전개되는 외주화, 전환배치, 구조조정은 결국 철도노동자들의 선택이 투쟁이어야 함을 보여줄 것이다. 냉정한 현실은 현장파의 확대 재생산을 도울 것이며, 존재 이유를 강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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