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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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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2 01:14:19, 조회:3,301, 추천: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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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사랑에 대하여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지역현장 활동가
오늘 동지들에게 예전에 내가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 한편을 들려주고 싶다. 꽤 오랜시간 흥분했고 지금 읽어도 참 현실적이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작품이다.
우리가 아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는 <어머니>를 쓴 막심 고리끼이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고리끼 외에도 투르게네프,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홉 같은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고리끼는 그를 ‘악마적 천재’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의 사람 내면을 꿰뚫어보는 심리묘사와 치열한 정신세계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그가 살았던 1821~ 1881년에는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려 하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 황제 짜르의 압제 속에 가난하고 고통 받는 러시아 인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아직 러시아에 노동자계급이 떠오르지 않을 때였다.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는 당시 러시아의 모순과 고뇌, 현실이 담겨있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휴머니즘이 담겨있지만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상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다보면 섬광 같은 빛이 번뜩이고 가슴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래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이야기 한편을 동지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신앙심이 부족한 귀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귀부인이 신부를 찾아와 자신의 신앙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처음에 무서운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심에서 비롯되었을 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평생 신앙 속에 살다가 죽음을 맞게 되면 갑자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제가 읽은 어느 책 속에서도 이야기하듯 <무덤위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라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신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린 시절에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을 가졌을 뿐인데요. 어떻게 하면 입증하고 어떻게 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모두가, 아무도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요. 단지 저만이 그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저는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죽을 지경!”
“그것을 입증하지는 못해도 확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으로요?”
“실천적 사랑의 실행으로 말입니다. 이웃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신의 존재도, 자기 영혼의 불멸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완벽한 자기희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확신을 얻게 되고, 또한 어떤 의혹도 당신의 영혼 속으로 찾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경험을 거친 사실이며 분명한 것입니다.”
“실천적 사랑이라뇨?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문제가 되겠군요. 저는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믿어주십시오. 모든 것을, 제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딸 리즈마저도 남겨 둔 채, 자비심 넘치는 간호사의 길을 걷는 공상을 가끔 한답니다. 그런 공상에 빠져 들 때면 억제할 수 없는 힘을 내부에서 느끼게 됩니다. 어떤 상처나 어떤 악성질병도 저를 겁먹게 하지 못합니다. 제 손으로 붕대를 매주고, 상처를 소독해 주며,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의 손발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들의 상처에 입을 맞출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훌륭하시군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런 생활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저의 가장 괴로운 문제란 말이에요! 눈을 감고 이렇게 자문해 보지요. 네가 그런 길을 오래도록 견뎌 낼 수 있겠니? 네가 상처를 소독해 주는 그 환자가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너의 봉사를 평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짜증을 부리면서 너를 괴롭히고, 네게 고함을 질러대면서 무리한 요구를 한 뒤 상관에게 불평을 털어놓으면 그 땐 어떻게 하겠어? 사랑을 계속 실천하게 될까. 혹은 그만 둘까? 이런 상상을 하다가 저는 몸서리치며 이런 결심을 했지요, 인류에 대한 저의 <실천적> 사랑을 식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배은망덕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봉급을 받는 노동자이니, 당장 그 대가를, 즉 사랑에 대한 사랑의 보답과 칭찬을 요구하겠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발작증세를 일으키며 도전적인 자세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그건 어느 의사가 오래 전에 내게 들려준 이야기와 똑같군요.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비록 농담이긴 하지만 가슴 아픈 농담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상을 할 때는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 정신에 빠져 들기도 하고, 만일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기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있게 되면, 그의 개성은 바로 나의 자존심을 짓누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하루만 지나면 그를 증오하게 된다. 식사시간에 너무 오래 먹는다던지, 감기에 걸려 계속 코를 풀어댄다는 이유로 말이다. 일단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난 사람들의 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한층 타오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절망에 빠져야 합니까?”
“아니요. 당신이 그 문제로 상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그토록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알 수 있으니, 이미 많은 일을 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진실성에 대해 나에게 칭찬받기 위해 이야기하신 것이라면 그땐 실천적 사랑의 성과를 하나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은 당신의 공상 속에서만 머물게 되고, 모든 삶은 환영처럼 아른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안일한 생활에 젖고 말겠지요.”
“당신은 완전히 나를 압도하고 계시는군요!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께서 말씀하셨듯이, 배은망덕을 참을 수 없다고 말씀드렸을 때 저의 진실성에 대한 당신의 칭찬만을 기대했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 고백을 듣고 나니 이제 당신을 진실된 사람이라고 믿겠습니다. 행복을 찾지 못하시더라도 자신은 훌륭한 길을 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두시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온갖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거짓을 감시하시고, 매 시각 매분 그것을 경계하십시오. 타인에 대해서건 자신에 대해서건 혐오감을 품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악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것이니까요. 두려움도 없애십시오. 비록 두려움이 온갖 거짓의 결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랑을 성취하는데 자신의 소심함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실행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당신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인 것에 비해 훨씬 가혹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공상적인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해 주는, 만족도가 빠른 성급한 성취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실제로 자기 생명까지 바치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기위해 무대 위에서처럼 얼른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바이지만, 만일 당신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다가가기는커녕 거기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서 목격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갑작스레 목표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 사랑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실천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백번 공감이 갔다.
나는 내가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느끼는 순간 잠깐 동안 행복하였다. 지역의 열악한 현실, 제대로 된 노조 하나 없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현장활동이 무엇인지 건강한 투쟁기풍을 만들고 지역의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을 실천하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힌다. 나도 모르게 다른 현장과 비교하며 “이 곳은 객관적으로 봐도 살기도 어렵고, 활동하기도 어려운 조건이다. 민주노조가 있는 곳도 어렵다고 하는데, 거기는 활동이라도 자유롭지만 여기는 사막처럼 불모지가 아닌가”하며 또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사실은 현실 그 자체의 막막함보다도 내 자신이 현실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에 더 고통스러웠다.
현실을 알았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새로운 결의를 세우게 된다.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혼란과 진통에 대해 오늘, 내일 답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답은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당장 전망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러면서 더 철저히 현실을 파악하고 목표를 분명히 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고 점검하자. 내 자신에게 진실하자. 늘 실천적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동지들 앞에 묻기로 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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