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수 열사의 장례식이 있던 다음날, 150여명의 파워그라인더 하청노동자들이 모였다.
바로 전날 직영노동자의 주5일제 협상이 타결되어 직영노동자들에겐 휴무일이었지만 하청 노동자들에겐 여전히 ‘일해야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파워그라인더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임금 삭감을 강행하려는 협력업체들에 맞선 그들의 요구를 정식화 해냈다.
실리를 철저히 계산한 열사투쟁의 합의안을 두고 현대중공업 자본은 자신감이 넘쳤던 듯하다. 근로기준법 위반의 온상이 되고 있던 일당제 하청노동자를 시급제로 전환하는 것도 모자라 임금삭감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열사의 처절한 외침과 하청이 뭉쳐 끝까지 투쟁하자는 하청노조의 처절한 외침을 지켜본 하청노동자들은 더 이상 호락호락한 노예가 아니었다. 임금삭감 반대를 명확히 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11개 항의 요구안’을 결의하고 하청노조로의 집단가입을 통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대규모 집단가입이라는 초유의 일은 자위권으로는 훌륭히 기능했다. 곧바로 임금삭감 기도를 유보시킨 것이다. 그러나 남한 노동운동 내에서 악명 높은 현중 자본의 노무관리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임금삭감의 유보를 통해 하청 노동자 투쟁의 발걸음을 멈춘 후, 개인 별로 회유와 협박을 하고 노조 탈퇴서를 강요한 것이다. 자본의 공격에 분노로서 결집했지만 투쟁 대오로서 조직되지 못한 하청노동자들과 하청노조는 몇몇 업체에서의 탈퇴서 작성을 용인하게 되었다. 현중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분위기를 잡았을 때 머뭇거림 없는 공격, 하청노조와 하청노동자들이 해내지 못한 부분을 자본은 너무나 쉽게 수행하고 있었다. 시급제 전환과 일방적인 시급 책정, 그리고 주요 업체에 대해선 계약만료 통보까지 우편으로 발송했다.
자본의 이러한 거침없는 공격은 우리에게 또 다시 교훈을 주었다. 자본의 공격을 되받아 치지 않고서는 우리 노동자들에겐 공격도 이후도 없다는 것이다. ‘자위권’은 그것을 행사할 때에야 비로소 ‘자위권’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위권의 발동은 이제야 겨우 시작되었다. 파워그라인더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에 집단적으로 “임금삭감 결사반대”가 쓰여 진 붉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서로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집단적인 힘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약해지 통보를 철회시키고 임금삭감 기도를 철저히 무너뜨릴 때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난 5월 13일 열사투쟁에 대한 선고 공판이 이루어졌다. 재판부는 주장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법의 테두리에서 해야 함을 종용하며 6명의 ‘피고’에게 일괄적으로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진짜 죄인은 열사의 피 값을 짊어지고 60여일을 싸워온 투사들이 아니라 수많은 열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본가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노동자에게 있어선 전혀 정당하지 않은 ‘자본’의 법률대로 투쟁을 억누르려 하는 것뿐임을.
이제 기계임을 거부하려 했던 한 늙은 노동자의 정신이 현장에서부터 투쟁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직 미약하고, 힘든 여정이 앞에 놓여 있지만 단결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자본의 칼날 앞에 발가벗겨지는 꼴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청노동자들은 많은 오류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고 계속해서 자본과 싸워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