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매수(買收)와 노동운동의 말살
1. 기생성과 부패는 자본의 힘의 원천
자본의 힘은 대단하다. 경제위기, 시장의 원리를 들이대면 아무리 반사회적 내용이라도 자본가에게 유리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재벌의 힘은 무한하다”고 자본은 큰소리치고 있다.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 SBS의 삼성그룹 이건희 ‘가짜 중계’ 사건은 ‘인격화된 자본’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게 하는 희대의 해프닝이었다.
오늘날 독점자본은 은행자본, 산업자본이 결합한 금융자본으로서 전사회에 걸쳐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금전적인 매수, 이사회 지위 보장, 정치권력, 국가관료와의 직간접적 결탁, 종교, 학문, 여론매체 소유 등을 통한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 혼맥관계 등 수많은 방식으로 전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중 핵심이 금전적 매수이다. 노무현 정권의 부패청산 노력은 자본주의의 내밀한 장막 일부를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찌르는 악취를 풍겼다. 노무현 정권은 황급히 장막을 닫았지만 그 장막 사이로 또 다시 김현철, 김중권, 김한길, 유종근 등이 줄줄이 연루된 ‘조동만 리스트’가 불거져 나왔다. 결국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는 권력의 의지나 자정결의, 부패방지법 제정 같은 입법화로 해결할 수 없는 고유의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부패와 기생성은 비용이 덜 들고, 공정한 경쟁을 하는 ‘합리적인 자본주의’를 위해 해결해야 될 문제이지만 동시에 대자본이 전사회를 지배하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직간접적인 금전적 매수(買收),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매수를 통하여 노동운동 진영 내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운동 상층과 대공장 노조를 파고드는 자본의 힘은 노동운동 내에 기회주의와 관료주의라는 숙주를 배양하여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을 말살시키고 있다.
2. 매수의 사례
지난 9월 15일 금속산업연맹 대의원 대회에서는 박일수 열사 투쟁 과정에서 반동적인 모습을 보인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했다. 과거 현대중공업 내에서 가장 전투적 조직이었던 현대중공업노동자투쟁위원회(현노투)의 핵심 멤버였던 탁학수의 어용으로의 변신은 민주노조 운동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탁학수의 변신은 노동운동에 미치는 자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95년 양봉수 열사가 분신했을 때, 현대자동차 5대 위원장이었던 이영복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쫓겨난 뒤에 ‘바지사장’을 내세워 회사로부터 아산 사내하청 두개를 받은 사실이 선거 당시에 노연투 내에서 논란이 됐다. 자동차 4사 해외매각 반대투쟁 당시에 정갑득 집행부는 현대자본으로부터 한겨레 광고비를 후원받았다가 들통이 나면서 사퇴하였다. 이밖에 어용 짓거리를 한 전임 대공장 위원장이 임기 뒤 “5층짜리 건물을 한 채 세웠다”는 얘기도 들린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획예산처의 예산을 받아쓰기 때문에 매수의 소지가 적은 한 공기업 전임 위원장이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93년 현대정공 김동섭 위원장은 직권조인 대가로 거액의 돈을 수수했다. 무노조 삼성의 경우에는 노조를 건설하려고 하는 활동가를 협박하거나 매수를 통하여 노조 건설을 봉쇄해 왔다.
기아자동차 하상수 집행부 당시 임단투 시기에 기아 자본은 월드컵 티켓 수십 장을 노조에 건네려 했다. 당시 집행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 자본이 어떻게 집행부를 매수하려 하는 지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하상수 집행부는 이후 한 간부의 조합원 검진 병원 선정 과정에서 병원 측의 매수에 넘어가면서 중도하차 했다. 현대중공업 김덕규 집행부는 강호동의 뇌물 비리 사건으로 집행부를 사퇴했다.
자본은 어용의 뇌물 수수는 철저히 불문에 부치지만 민주파 집행부 내의 비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폭로하거나 이를 계기로 협조적 노사관계를 요구한다. 현중의 어용들은 강호동 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자 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결국 집행부는 사퇴했다. 이후 최윤석 어용 집행부는 ‘투명한 노조’를 내걸고 ‘해고자 청산’ 만행을 저질렀다. 어용 노조가 투명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 것이다. 하상수 집행부의 사퇴 이후에 등장한 기아차 17대 박홍귀 집행부는 간부의 몇 차례 의혹사건 연루에도 불구하고 사퇴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자본은 노조 운동 세력들의 비리 파일을 가지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 ‘이 집행부는 몇 개월짜리’라고 할 정도로 노조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노조의 조합원 선물 지급이 아예 없지만 대부분의 대공장 노조는 조합원 선물 선정 과정에서 수많은 업체의 뇌물 공세에 담당 간부가 연루되어 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을 집행부 선거 비용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자본은 대의원들한테도 광범위하게 매수공작을 펼치고 있다. 과거에는 대의원 활동을 철저하게 통제했으나 최근에는 대의원들의 근태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면서 힘든 작업장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다. 심지어 현대자동차에서 한 대의원은 야간에 회의를 핑계로 잠을 자다가 조합원들한테 들키는 사례도 있었다. 대공장에서 대의원들은 며칠 동안 계속되는 대의원대회, 맨아워, 신차관련, 특근 협상 등으로 반상근 이상을 인정받고 있다. 자본은 대의원들에게 금품 수수, 향응 접대, 법인 카드 지급, 매춘 등 추악한 방식의 매수를 일삼고 있다.
기아차 박홍귀 집행부는 지난 8월 19일 조합원들의 대의원에 대한 불신을 핑계로 조합비 인하와 대의원 수 축소를 총회에 부쳤다가 압도적으로 부결되기도 했다. 기아차 김량국, 김우용 대의원의 경우처럼, 자본은 매수공작에 넘어가지 않은 민주파 대의원들에게는 혹독한 탄압을 가하고 있다. 자본의 매수는 해고자들에게도 미치고 있다. 현대미포조선은 한 해고 동지에게 해고 초기에 과일바구니에 돈 봉투를 넣어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자본은 해고 활동 중단의 조건으로 수억의 돈을 제시하고 회유를 거부하면 혹독한 탄압을 가한다.
자본은 이밖에 회사 살리기, 노사 상생, 다물사상 같은 극우적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각종 교육과 노무관리를 통해 유포하면서 포섭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3. 개량주의, 관료주의의 사회, 경제적 기초 -매수-
노조 간부나 대의원, 심지어 현장 활동가들한테까지 파고드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노동운동 내부의 기회주의 이데올로기, 금전적 매수와 탄압, 민주노동당의 지자체, 국회입성으로 인한 출세의 지위 보장 등이 남한에서 개량주의, 관료주의, 기회주의의 물질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전투적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는 오랫동안 이 기회주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일각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로부터의 초과착취를 통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매수가 노조 관료주의의 물적 기반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일부 진영에서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에 실리주의로 포섭되어 상당 기간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없을 것이고 투쟁의 주체는 오직 비정규직 노동자 대오일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또 다른 진영에서는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독점적 초과이윤이 노조 관료제를 강화하고 노조 관료집단을 필연적으로 등장시킨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엥겔스의 노동귀족론에 근거하여 노동귀족론, 노동관료제의 물적 토대를 밝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남한 내의 전투적 진영 일각에서는 레닌의 노동귀족론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하고 실천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레닌은 1920년 ‘제국주의론’ 서문에서 기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초과이윤(이 이윤은 자본가들이 ‘자국의’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고 있는 이윤 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므로 초과이윤이다) 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선진’국 자본가는 실제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직접․간접으로, 또 공개․비공개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조아지화한 노동자층 혹은 ‘노동귀족’층은 매우 속물적인 생활양식, 소득규모,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지주(支柱)이자 오늘날에는 부르조아지의 주요한 사회적(군사적은 아니지만) 지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에 있어서 부르조아지의 실질적인 하수인이자 자본가 계급의 노동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남한에서 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기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확고하고 노조 관료제를 필연적으로 등장시킨다는 주장은, 노자간의 계급관계를 변화무쌍한 물적 관계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제주의적, 객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됐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기회주의에 압도당하면서 패배주의를 낳을 수 있다. 레닌은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가 노동귀족론을 주장하던 19세기 중반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독점적 위치와 제국주의 시대를 비교하여 사용했다. 레닌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제국주의 시대는 제국주의 국가간의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자본주의 모순과 경쟁의 격화 등으로 대중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지자 기회주의의 대중적 물적 기반이 불안정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 상황의 뚜렷한 특징은 노동계급운동의 전반적․필수적 이해와 기회주의 간의 비화해성을 더욱 증가시키는 경제적․정치적 조건들이 우세해졌다는 데 있다. 즉 제국주의는 맹아의 상태에서 지배적인 체제로 성장했고, 자본주의적 독점체는 경제와 정치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세계분할이 완료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전일적인 독점에 대신하여 몇몇 제국주의열강들이 이 독점에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바, 이 투쟁이야말로 20세기 초반 전 시기의 특징이다. 이제 기회주의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처럼 수십 년 동안이나 한 나라의 노동계급운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나라들에서 익고 무르익고 썩어 버려, 결국에는 ‘사회배외주의’라는 형태로 부르조아정책과 완전히 융합되어 버린 것이다.(레닌, 「제국주의론」, 제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후화)
따라서 레닌의 노동귀족론은 자본이 노동자 대오 상당부분을 매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본의 불안정성과 취약성 때문에 노동운동 내의 노동관료를 매수한다는 의미로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레닌의 ‘극소수’, ‘일시적’이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실천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할 수 있다. 레닌은 자본에 매수당한 소수의 노동관료들이 노동자 계급 전반의 고통과 절망적 현실의 기초 위에서 기회주의적 행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부르조아적 노동자당’이 모든 제국주의 나라에서 불가피하고 전형적이지만,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싸고 그들이 벌이고 있는 필사적인 투쟁을 생각하면, 그러한 당이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번창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트러스트와 금융과두제, 고가격 등은 소수의 고위층을 매수할 수 있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반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을 점점 더 억압하고 짓밟으며 파산시키고 괴롭히기 때문이다(레닌, 「사회주의 내의 분열과 제국주의」)
레닌은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만약 기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보적 자본주의라면, 혹은 기회주의로 기우는 것이 바로 가장 임금수준이 높은 노동자들이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의 대의는 이미 무의미해져 버렸다”는 카우츠키 같은 기회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사실상 기회주의의 발전이 유달리 빨랐으며 유달리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기회주의의 지속적인 승리를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라면서 기회주의에 대한 승리의 필연성을 역설한다.
레닌의 노동귀족론과 관련하여 토니 클리프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보수적인 적은 계층만이 서구 자본주의가 크게 팽창하는 것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는 레닌의 가정은 틀렸다. 자본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다면 그 이익은 절대 노동계급의 한 부문에 한정될 수 없다”고 하면서 “서구에서, 더구나 노동조합 기구가 몇 십 년 동안 존재해 왔고 굳게 자리 잡은 영국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노조관료주의의 파괴에 앞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토니 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평조합원 운동’을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서구에서 혁명운동의 패배주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노조관료주의를 파괴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가? 또한 이는 남한 노동운동 내에서 실천적으로 노조 ‘생래적 한계론’이나 ‘산별노조 필연적 관료화론’ 같은 노조 운동에 대한 기권적인 태도를 낳았다.
다시 한번 우리는 레닌의 ‘노동귀족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실천적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노동운동에 있어서 기회주의적 조류는 경제적인 근거에 기초한 하나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 같은 레닌의 인식은, 첫째로 노동운동이 두 조류의 투쟁을 통하여 전개된다는, 현실을 회피하려는 ‘낙관론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고, 둘째로 기회주의는 그 ‘근거’자체가 불안정하고 과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승리는 일시적․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本間要一郞,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
4. 취약한 물적 토대 -거짓 사회적 합의주의-
현 시기 세계자본주의와 남한 자본주의에서 개량주의, 관료주의의 물적 토대는 안정적인가? 선진 자본주의는 1945년부터 73년경까지 장기호황을 구가하면서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축적위기에 봉착한 선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황금기의 일시적인 임금인상과 복지의 향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체제내화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장기호황 동안에도 계급 역관계에 따라 노자간의 물고 물리는 접전은 계속됐다. 오히려 호황기 동안 노자간의 계급투쟁은 증가하였고, 79년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의 공세에 의해 80년대 노동자 계급은 수세적 위치로 내몰리면서 패배를 거듭했다. 자본의 공세에 의해 오랫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서구 유럽의 노동자 계급은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의 투쟁으로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번영이 서구 자본주의에서의 ‘복지국가’ 건설을 낳았다는 것은 노자간의 관계를 단순화시키는 경제주의적 분석에 불과하다. 노자간의 계급 관계는 자본주의의 호황, 불황 같은 객관적 조건의 영향을 받지만 노동자 계급의 투쟁력, 단결력, 계급의식의 정도, 당적 조직화 정도 등 주체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남한의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계급투쟁을 분출해 왔고 전반적인 임금인상과 단협을 쟁취해 오다가 97년 경제공황을 맞아 ‘양보교섭’과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 노동자 계급은 무수한 패배를 거치면서도 저항을 거듭해 왔다. 이 ‘패배 속의 저항’덕분에 남한 노동자 계급은 궤멸되지 않고 최소한의 방어선을 구축해왔다. 남한 자본가 국가는 병영적 노동자 통제에서 90년대를 거치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고 노동관료를 육성해 왔다. 단사에서는 이것이 신경영전략으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 말기와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면서는 노사정 협의체와 노사정위원회를 통하여 상층 노동관료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포섭해 들어왔다. 그러나 남한자본주의의 관료들을 통한 포섭전략은 노동자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의해 끊임없는 부침을 겪어야 했다. 노무현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 전략은 노사정위원회, 관료주의적 산별 중앙교섭, 지역․업종별 협의회, 자동차산업노사협의체 등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중층적, 총체적 교섭구조’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개량주의, 관료주의자들의 ‘교섭주의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다.
남한 자본주의는 노동자 대중들을 포섭할만한 안정적인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개량주의자들이 시도하는 노사동반자 관계는 ‘거짓’ 사회적 합의주의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관료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지위는 배신, 기만과 사기행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개량주의, 관료주의의 물적 토대의 안정성을 소수의 노동관료들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매수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매수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6, 70년대 한국노총 어용 관료들이나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저발전 국가에서도 이런 종류의 매수는 끊임없이 행해졌다.
민주노동당의 존재나 대공장 노조 대의원들한테도 가해지는 매수의 확대가 물적 토대의 한 측면이라면 더 압도적인 반대의 경향도 살펴보아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가해지는 노동자 계급 전반에 대한 자본의 가혹한 공격들, 농민에 대한 억압과 수탈의 증대, 쁘띠부르주아의 불안정성은 소수의 노동관료들에 대한 매수 경향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매수당한 노동관료들은 거짓 사회적 합의주의를 끊임없이 유포하고 대중들을 기만하는 속에서 자신들의 관료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관료적 지배는 내부의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하여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2004년 노자간의 계급투쟁은 이러한 영상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자본과 정권은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대공장 ‘고임금론’을 유포하고 조직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잔업을 통제 당하는 근속 10여년이 안되는 현대중공업 노동자의 임금은 겨우 70만 원 대에 불과하다. 여전히 현대중공업 도장부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저시급자에 속한다. 87년에 입사한 사회보험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고작 3100만원이나 32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자본이 악선동 하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4천만원대 ‘고임금’ 조차도 장기근속에다가 잔업, 특근, 야간노동을 밥 먹듯 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보건의료노조, 궤도, LG칼텍스정유, 코오롱 노동자들은 자본의 ‘고임금론’ 악선동 앞에서 하나같이 “우리들의 요구는 임금인상이 아니다”라는 수세적인 변명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올해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부분 백기항복과 타협으로 패배했다.
자본과 정권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조직된 대공장 사내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요구에 대해서도 정규직 인상액의 80%와 1차 사내 하청 노조에 한정했다. 이러한 분할공세는 2, 3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깨졌다. 현자, 기아 등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부분적인 저항과 기만적 처우개선은 무수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에 기반한 것이다. 건설일용노조의 예에서 보듯 자본과 정권은 집단적 방어막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한층 더 가혹한 수탈과 억압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노동부는 파견허용 업무를 현행 26개에서 전면 확대하고 파견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개정안과 ‘기간제및단시간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 제정안을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 어용 관료들조차도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공언하고 있다. 9월 16일에는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들 “이는 비정규노동자에게 눈물과 고통만을 안겨주는 ‘노예제도의 합법화’ 이자 대다수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노예제도의 대중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로써 민주노총을 비롯한 정규직 노동조합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비정규직 규모를 줄이고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결국 노동조합의 투쟁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기만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면서 열리우리당 기습점거 투쟁을 감행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렇게 현 시기 자본과 정권의 공세의 성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004년 상반기 자본과 정권의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고임금론 공격은, 투쟁전선을 교란, 분쇄하고 기만적인 방식의 주5일제 도입으로 자칫 줄어들 수 있는 이윤을 높이고, 단협을 전면 개악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이러한 공세에 대부분의 대공장 노조가 타협과 백기항복으로 마무리하자 이제 자본과 정권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 공격을 통해 비정규직의 확산과 제도화를 2차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5. 현장혁신과 계급투쟁의 방향
노동대중의 물질적, 생존권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끊임없이 그들을 배신하고 사기 치지 않으면 안되는 개량주의 관료들의 객관적인 지위는 대단히 불안정하다. 그런데 왜 남한에서 관료주의, 개량주의자들은 취약한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가? 전투적 노동운동 진영의 무능력, 무기력, 끊임없이 분출하는 대중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력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다. 결국 개량주의 관료들은 이른바 대중들의 패배주의, 정치적 전망부재, 검증된 전투적 지도력의 미구축 등 이른바 ‘대안부재’에 기초하여 관료적 지도력을 재생산 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노조에서 민주파 진영의 무능력, 타협주의에 기초해 배일도 잔당들이 반사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자본의 대공장 대의원들에 대한 매수로 인한 정치적, 도덕적 타락, 노동운동의 배신에 대해 기아차 박홍귀 집행부는 자신들의 협잡(挾雜)을 은폐하고 조합비 인하와 연동하는 대의원 수 축소를 기도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조합비 인하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대의원 수 축소에 압도적인 부결을 던졌다. 자본에 매수당한 대의원들이 미워도 투쟁의 성과를 반영하는 대의원 축소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8월 23일 기아차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일부 대의원들은 ‘자정결의’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최근 대공장 해고자들의 경우에도 통상급 수준의 조합비를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해고자들은 투쟁을 회피하고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고 있다. 대공장 해고자들의 경우에는 투쟁파, 협조파로 분화되고 있다. 과거 우파, 좌파 등 정치적 경향에 상관없이 전투적 기풍을 유지하던 해고자 대오 내부도 ‘분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고자 투쟁의 성과인 해고자 생계비 지급을 동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본의 의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현중 최윤석 어용 집행부의 해고자 청산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단순한 ‘자정결의’와 해고자 ‘출석부 공개’같은 대증요법만으로 자본의 물질적 유혹과 회유, 탄압에 맞설 수 없다. 간부 비리 사건으로 집행부가 사퇴한 뒤 기아 ‘현장의힘’ 내부에서는 혁신 논의가 전개됐다. 하지만 그 혁신논의는 전투파 일부의 조직탈퇴와 더불어 현장의힘을 근본적으로 쇄신하지 못했다. 2004년 임단투에서 현장의힘 소속 교섭위원들은 기만적인 임단투 잠정합의안에 동의했다. 결국 자조직 교섭위원들이 도출해낸 잠정합의안에 대해서 현장의힘은 부결도 가결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현자 수준보다 높다”고 강변하는 기만적인 잠정합의안에 대해서 부결을 던졌다. 2차 잠정합의안 찬반투표에서 기아 현장의힘은 부결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중적 행보는 기회주의자들이 현장의힘 내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월 4일 화성 현장의힘 임시 총회에서는 ‘조직원 성향분석’ 문건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다가 화성 16대 집행부 출신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총회를 퇴장하고 현장의힘 중앙위 수련회에서 이와 관련한 논의를 가졌다. 중앙위 수련회에서는 중앙위 이름으로 화성 현장의힘 해산을 권고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9월 10일 화성 현장의힘 해산 공고를 하는 총회에서는 해산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결국 결정을 유예했다. 기아차 화성공장 내 현장조직은 비정규직 투쟁과 현장 내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동지들을 중심으로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실천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현재 ‘사회적합의주의․노사정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 내부는 여러 가지 논란과 분명한 약점과 한계를 안고 있다. 전노투 내부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전략적 반대냐 전술적 반대냐를 둘러싼 논란이 전개됐다. 이 논란은 단순히 내거는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공헌기금을 둘러싼 자동차 4사 투쟁, 궤도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상반기 투쟁에 대한 평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노사정위원회 중심의 대응이냐 개량주의, 관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주의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투쟁이냐의 노선과 투쟁 방향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 전노투는 지난 8월 31일 민주노총 중앙위에서 내년 1월로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 건’을 미루면서 현실의 당면한 투쟁에 집중하는 것으로 결의가 모아지고 있다. 관료주의적 산별노조 건설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서울대병원 지부의 투쟁, 파견근로 전면 확대에 맞서는 투쟁, 향후 쏟아져 나올 전국적 투쟁을 지지, 엄호, 조직하는 것이 전노투의 조직적 임무이다. 현재 전노투는 초기의 우려처럼, 현장의 능동적인 참여가 대단히 부족하다. 또한 전노투 참가를 고민하고 있는 현장조직이나 비정규직 동지들의 경우에는 과연 자신의 현장 내에서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선전전, 출근투쟁 정도 말고 사회적 합의주의와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 지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사회적합의주의에 맞서는 대중적인 흐름을 어떻게 창출해 나갈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단 문제는 현장 내에서 통상적인 수준의 투쟁이라도 진행하고 실천적으로 부딪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전노투 참가와 관련하여 전투파 진영 일각에서는 “전노투 내에 회색분자들이 있기 때문에 참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동지들이 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은 파시즘과의 전투에서 독일사민당을 파시즘의 첩자로 규정하고 공동전선을 거부했다. 결국 스탈린주의적 극단적인 좌편향 결과는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와 파시즘의 득세라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비교대상의 규모가 다를 수는 있지만 통일전선전술의 기본원리는 동일하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전선에 있어서 이에 동의하는 제반 세력과 같이 해야 한다. 이 속에서 전투적 진영은 내용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주도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도주의 조직을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 전선으로 끌어당기고 궤도연대 투쟁에서의 중도주의자들의 태도, 현대자동차 집행부의 사회공헌기금 같은 주장들을 대중적으로 폭로해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합의주의를 효과적으로 반대하기 위하여 공동전선을 하는 것이지 폭로, 타격을 먼저 하기 위해서 공동전선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회색분자’와의 공동전선을 반대하는 동지들은 선전가들이 아니라면 극소수 고립된 전투적 진영이 독자적으로 사회적합의주의에 맞서 어떻게 투쟁할 지를 대안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전노투 내의 전투적 진영 내에서 중도주의자들과의 공동사업 성사를 위해서 실용주의적, 절충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동지들이 있다. 두 가지 흐름 모두 노동자 통일전선전술을 실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물론 전노투가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 전선을 독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현장, 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실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흐름들은 전노투라는 조직 틀로 포괄되지 않더라도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중도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전술로 노동자들을 절멸시키려고 하는 사회적합의주의 공세를 분쇄하지 않고, 이 공동전선을 통하여 대중적 지도력을 획득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구체적 투쟁에 연루되지 않고 어떻게 노동자계급운동의 ‘전략적 중핵’을 창출할 수 있는가? 전략적 중핵 창출과 구체적 투쟁 사이에 장강(長江)이 놓여 있다면 그 험한 물살을 헤쳐가지 않고 어떻게 장강 너머를 얘기할 수 있는가? 자신들을 실천으로 검증시켜내지 못하는 백면서생식 냉소주의는 선전주의와 대기주의, 패배주의를 낳으면서 종국에는 자본가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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