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현장조직 운동과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의 의회 입성에 대한 운동진영 내에서의 환호의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4월 24일 대전에서는 기아 현장의 힘에서 제출한 제안서를 중심으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이하 전국회의)의 해산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가 진행됐다. 이러한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전국회의의 위상과 전망 논의, 전국회의 확대․강화냐, 해소냐, 현행 유지냐의 안을 놓고 논쟁이 진행되었다. 당시 논쟁에서는 확대․강화하자는 안이 채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 방안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방안은 현실적인 힘을 갖지 못하면서 흐지부지 되었고, 전국회의의 뇌사 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회의는 해산 결정을 내릴 힘조차 없다.”는 자조적인 탄식도 나왔다. 조직이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할 힘이 없으면서도 해산 논쟁에 부딪힐 때마다 반대가 제기되는 이유는, 선진 활동가 스스로의 조직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현재로선 대중적으로 개량주의, 관료주의에 맞설 수 있는 다른 조직적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개량주의, 관료주의에 대한 대립의 산물
전국회의는 단사, 지역별로 산개해있던 현장조직들의 전국적 결집체였다. 전국회의는 현장 내에서의 관료주의와 노동자 정치조직운동의 개량주의에 맞서는 대립물(그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되었든)로서 현장조직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결의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결집은 96년 말, 97년 초에 전개되었던 총파업 투쟁이 민주노총 지도부와 대공장 일부 노조의 관료주의와 타협적 태도로 패배로 돌아간 뒤 97년 3월에 시작되었다. 관료, 개량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운동은 “의회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아서 총파업 투쟁이 패배했다.”라면서 민주노동당의 모태가 된 ‘국민승리21’로 집결하였다. 반면에 현장 내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전투적 흐름들은 전국회의로 결속하면서 대립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97년 11월 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독자집회로 분출되었다. 당시 ‘국민승리21’은 체육관 내에서 권영길을 대통령 후보로 대중적으로 추대하는 축제의 장을 연출한 반면에 체육관 밖에서는 전국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2천여 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을 외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정위 참여와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 직권조인으로 인해서 98년 2월 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합의안 가결/부결 입장으로 대립은 더욱 날카롭게 표출되었다.
어긋난 운명
이러한 상호 대립적 운동은 민주노동당의 10석 확보와 제 3당으로의 부상이라는 빛나는 성과와 전국회의의 조직해산 위기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어긋난 운명은 아직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운명적 대립은 새로운 형태와 수준에서 반복되면서 계속될 것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이를 부담스러워 하면서 경계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가혹한 공격과 생존의 위기,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민주노동당의 무기력, 무능력은 대중들의 기대와 환상을 실망과 분노로 바꿔놓을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이 그러했듯 10여석 밖에 안되는 극소수 정당으로서의 한계로 돌리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의 확산을 호소하며 돌파하려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기반인 민주노총 내의 관료주의자들은 지역, 업종별 협의, 노동부와의 정례회동, 경총과의 정기만남, 새로운(?) 형태의 노사정위 참여 등 중층적 교섭구조(중층적 계급투쟁 질식구조)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끊임없이 모색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의 관료주의 세력들의 노자타협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와 개량주의적 의회진출은 전 세계적인 자본의 위기(불안정하고 짧은 호황과 만성적 불황과 극심한 공황)와 자본 간의 경쟁격화라는 냉정한 현실의 간극에 의해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들의 비현실성과 비실용성의 불안정한 토대, 가장 원칙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는 진리성의 확고한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해 노동자들의 연이은 분신으로 폭발한 계급투쟁과 올해 총선 국면의 박일수 열사투쟁은 관료주의, 개량주의자들의 노자타협주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마구 흔들어 댔다. 그러나 이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구심의 부재로 인해 계급투쟁은 전국전선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기만적 합의로 마무리됐을 뿐이다.
전국회의가 해소가 되든 안되든 새로운 질로 나타나는 위로부터의 개량․관료주의적 흐름과 아래로부터의 전투적 흐름은 계급투쟁의 현실로 인해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적 충돌의 이면에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과연 어떤,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이 질문 앞에서 현장조직의 선진적 활동가들은 ‘현장투쟁’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겨서는 안된다.
정치적 신념과 표현 방식
현장조직은 의회주의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부로 왜곡돼있는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아 왔다. 그 선택은 항상 “조직적으로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 단 개인의 선거 참여는 존중한다.”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만들어냈다. 특히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의회 내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활동이 현실화되면서 이러한 선택 강요와 딜레마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는 우선 단일한 정치적 결사체가 아닌 현장의 대중투쟁을 매개로 모인 현장조직의 조직성격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현장조직의 이러한 조직적 성격이 현장조직의 정치조직과의 결합,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을 막는 것은 아니다. 이는 노조와 정치조직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현장조직과 정치조직은 그 형식에서는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강고하게 결합해야 한다. 정치조직은 민주집중제 원리 속에서 현장조직의 조직적 위상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현장조직의 계급성을 강화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반대로 현장조직은 현재의 수준에서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면 정치조직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현장조직이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이라 하더라도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현장조직 성원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전국회의 소속이 아니더라도 전투적활동가로 불리우는 동지들 대부분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적이다. 전투파 현장조직 내 선진 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 사업장에서도 민노당 당원이 상당히 많지만 정치조직의 조직원이라는 사람들의 그 구성을 보면 혼란스럽다는 거지요. 예전의 어용도 민노당 당원이고 열심히 현장투쟁했던 사람도 민노당 당원이니 저 당은 무슨 놈의 당이 저러나 하지요.”
“이번 선거는 민노당에 표를 찍는 사람들이 내가 나서서 투쟁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 우리 국회의원을 뽑아서 그들이 대중은 투쟁하지 않아도 얻어줄 수 있다는 대리주의를 보여준 투표라고 하기도 했어요.”
이밖에 선진활동가들은 노조가 대의원대회를 통해 민노당 기금 결의를 하는 것에 대해, 정치선택의 자유를 근거로 한 반대, 서구 사민주의의 경험과 브라질 PT당의 사례 등을 들어가며 비판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선진활동가들이 가진 정치적 신념과 그것의 대중적 표현방식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당내의 이질적 구성에 대한 비판은 “당은 강령의 일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결사체”라고 하는 정치적 준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다. 대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전제됐을 때 가능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에서는 “우리는 대중정당이다.”라고 피해가고 있다. (물론 대중정당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쟁이 필요하지만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민노당 후보의 자격을 거론하면 “당원 중에서도 그런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내부적으로 차기에는 그런 사람이 안나오도록 노력하면 될 거 아니냐”라고 반박한다. 대리주의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밖에서 짖지만 말고 직접 참여해라.”라고 빠져나간다. 이러한 정치적 신념과 대중적 표현방식(조직방식 또는 설득방식)의 간극으로부터 비롯되는 현장활동의 어려움을 선진활동가라면 다 안고 있다. 이로 인해 선진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비판 행위가 아닌 냉소적 태도를 보이거나 민주노동당의 의의를 마지못해 인정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이 얼마나 현장을 변화시켜낼 것인가?” 등 소극적 비판에 그치기도 한다. 또한 “조합원들이 민노당을 찍겠다고 하면 죽어도 찍지 말라는 말은 못했다”라거나 “민노당 후보에게는 투쟁현장의 치열한 쟁점을 선거 공간에서 ‘제대로 나발 불어대라’고 주문하지요”정도의 대응을 한다.
이러한 현장활동의 현실적 딜레마는 대략 세 가지 지점에서 비롯된다.
첫째, 그나마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조직노동자 일부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 당선된 지역구를 보더라도 울산, 창원 등 투쟁 경험이 풍부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밀집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계급적 관점에서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흐름도 가장 먼저 형성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둘째,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비해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왜곡된 형태로라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조직적 독자성이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독립성의 상실은 조직적 독자성마저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 탄핵 정국에서 민주노동당의 혼란스러운 대응을 보라!)
셋째, 민주노동당에 반대하는 확실한 정치적 전망과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 중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민주노동당 반대’
결론적으로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다.”라는 도식적 비판을 가지고는 고립되지 않고 대중적 정치활동을 수행하기 어렵다. 대중들은 개량주의=악이라는 선험적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에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지지한다면 커다란 힘이 될 것 아닌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의회 진출 보다는 대중투쟁이 중요하다.”라는 비판적 선긋기만으로도 효과적인 비판이 될 수 없다. 최근 정치연수원에서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은 “원내의 힘만으로는 안된다.”라고 당선자 교육을 했다. 민주노동당 내 평등 연대에서도 대중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물론 이들은 민주노동당 활동이 대중투쟁을 어떻게 가로막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최근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의 의원․당직 겸직 금지 결정도 대중투쟁과 의회투쟁을 병행하지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결국 대중의 자기경험과 실천으로부터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대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안되면 효과적인 민주노동당 비판이 될 수 없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철회가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지지로 후퇴할 수 있다. 실천적 폭로와 조직화. 바로 그것이다.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은 대중투쟁의 쟁점을 가지고 끊임없이 민주노동당과의 공동투쟁을 끌어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현장 대중들의 눈치 때문이라도 동참할 수밖에 없도록 견인하고, 선거를 이유로 불참하면 대중적으로 폭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의 공동투쟁에 있어서도 그들의 노사협조주의에 끌려다니지 말고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누가 더 노동자 계급의 생활상의 구체적인 요구와 계급적 이해에 헌신적이고 충실하게 싸우는 세력인지를 검증시켜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민투위 출신 현대자동차 집행부는 민주노동당에 반대하면서도 위에서 언급한 딜레마 때문에 이상욱 위원장이 조승수 후보의 공동선대본부장을 맡고, 민주노동당 지지운동을 했다. 현실적으로 대중조직을 운영하면서 이해할 수도 있는 측면이다. 문제는 참여 자체가 아니라 내용에 있다. 현대자동차 집행부와 민투위는 조승수 선대본 내에서 대중투쟁의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 울산에서는 총선 전부터 박일수 열사의 분신투쟁이 대중투쟁으로 타올랐다. 민주노동당은 마지못해 이 투쟁에 동참하면서도 선거에 미치는 영향에 조바심을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가 대중투쟁의 주도성을 잡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의 후위부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 열사투쟁을 지지․엄호하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책위 지도부의 연행 이후에 투쟁 지침은 있었으나 집행부는 이를 대중투쟁으로 확산시켜내지 못했다. 또한 대의원대회에서 비정규직 직가입 결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현중 사내하청 투쟁을 정규직의 계급적 연대의식 확보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조직화 계기로 삼지도 못했다.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로 민주노동당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타격해야 하는데 과연 무엇을 무기로 할 것인가? 선진 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 반대를 대중적으로 실천해내기 위해서는 명확한 계급적 의식과 정치적 전망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총선 이후에 자본 진영에서는 “반시장 또는 친노조 성향의 인기 정치, 이념 정치가 한국경제의 리스크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라며 실용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념 반대자의 이념’이다. ‘반시장 친노조’를 비판하는 시장논리의 확대와 반노조야말로 자본의 노골적 이념공세가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공세 앞에서 민주노동당은 탄핵기각 발표 이후에 계급화해적 ‘상생의 정치’를 외치면서 창과 칼을 스스로 반납하는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이념은 노자간의 전투에 임하는 병사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개량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좌우 이념의 평화로운 공존으로 해석하면서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현장의 선진활동가와 현장조직은 이러한 개량주의에 맞서 ‘현장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양날개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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