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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0호]인도 비하르(Bihar) 주(state), 소달구지 자본가의 몰락 - 인도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강화
노정협   2013-11-29 19:18:54, 조회:2,870, 추천:176

인도 비하르(Bihar) 주(state), 소달구지 자본가의 몰락
- 인도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강화


이병진(국가보안법 탄압으로 전주교도소 수감 중)




랄루, 17년 만에 유죄 선고를 받다


2013년 10월 3일, 인도의 뉴델리에서는 인도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특별재판이 열렸다. 이날은 고등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특별재판에 상고된 후 무려 17년 동안 진행된 랄루 재판의 선고일이었다.

피고인은 전 비하르 주지사(chief Minister)였던 랄루 쁘라사드 야다브(Lalu Prasad Yadav)이다. 그의 주요 범죄는 주지사 재직 시절인 1990년∼1995년 사이에 가축사료 기금 95억 루피(Rs, 약 1천600억 원)를 불법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날 특별법원은 랄루를 공금유용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 5년과 벌금 250만 루피를 선고하였다.주1) 이로써 17년 동안 끌어온 랄루의 재판은 종결되었고, 사실상 비하르 지역의 왕이었던 랄루의 시대도 끝났다.

랄루는 인도중앙수사국(Central Bureau of Investigation)의 특별기소로 1997년 7월 30일 구속됐지만, 주지사직을 그의 아내인 라브리 데비(Rabri Devi)에게 물려주어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또한 그 해에 자타나 달(Janata Dal)을 탈당하여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라쉬뜨리아 자나타 달(Rashtriya Janata Dal)을 창당하였다. 랄루는 그 자신이 이 새 당의 대표가 되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비하르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막강하였다. 그는 자신의 심복을 중앙정부 장관에 입각시켰고, 2004년에는 랄루 자신이 중앙정부의 철도부 장관까지 꿰차며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다보니 인도중앙수사국(CBI)는 정치적 거물인 랄루를 제대로 수사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랄루의 특별재판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지지부진 시간을 보내며 17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비하르 주에서 철옹성 같은 랄루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2000년에 비하르 남부 지역에서 분리된 자르칸드(Jharkhand) 주가 새롭게 생기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하르에서 야다브 카스트를 반대하는 여론이 힘을 얻으면서 자나타 달(통합파)과 인도국민당(BJP)이 연합하여 2005년 주정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2010년 주정부 선거도 자나타 달(통합파)과 인도국민당이 연합한 진영이 승리함으로써 랄루의 정치적 몰락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이번 특별재판소의 확정판결은 이런 랄루의 정치적 퇴락을 확증시켜주는 일이었다. 사실 인도에서 거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는 일상적인 일처럼 흔한 일이다. 그래서 랄루의 재판도 그런 정치 지도자들의 치부를 하나 더 보태는 진부한 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랄루의 정치적 흥망성쇠는 한 명의 정치적 야심가의 삶뿐만이 아니라 신흥 하층 카스트 세력의 성장과 몰락이라는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왜냐하면, 랄루의 정치적 성장과 몰락은 여타 후진 계급(Other Backward Class; OBC)인 ‘야다브’ 카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야다브’ 카스트는 우유를 짜는 하층 카스트인데 인도 정부의 차별적 보상 정책인 ‘만달(Mandal)’ 정책 주2) 이후 비하르에서 지배적인 카스트 집단으로 발전한 대표적인 신흥 하층 카스트 집단이다.

이 글은 랄루가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인도 정치 과정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랄루의 정치적 몰락의 의미와 현재 인도 정치의 특징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비하르 여타 후진 계급(OBC)의 사회 경제적 배경


비하르 주는 인도 북부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고, 인도에서 12번째로 큰 주로 인구는 9000만 명이 넘는다. 이곳은 시멘트, 철광석, 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하르는 영국의 식민지 자원 약탈 정책으로 마드야 쁘라데시(Madhya Pradesh)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

인도 부르주아 계급은 1960년대부터 비하르의 낙후한 경제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1970년대에는 농촌 경제를 살리고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 ‘식량작물계획(The Food for Work Programme)', '통합농촌개발계획(The Integrated Rural Development Programme)' 같은 정책도 실시했지만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런 정부의 보조금과 각종 지원 정책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고 오직 토착 지역 자본가들의 자본축적에 기여하게 된다.

인도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경제발전 전략은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에게 정부 보조금 같은 유인책을 주어 경제적 생산활동을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보니, 구조적인 불평등 구조로 꽉 짜인 비하르에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뿐더러, 정부 보조금은 지역의 소자본가들과 부농들의 배만 불려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막대한 정책 자금이 토착 부농들과 소자본가들의 자본 축적을 촉진하면서 농부 자본가 또는 ‘소달구지 자본가’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인도 거대 독점 자본가들과 경쟁관계라는 측면에서 대립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서는 독점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의 한 요소이다.

비하르의 야다브 카스트도 여타 후진 계급(OBC)이지만, 소달구지 자본가들의 성장과 함께 지배적인 계급이 된다. 이것은 비하르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펀잡(Punjab)에서도 농부 카스트인 자트(Jat)들이 하층 카스트임에도 이 지역에서는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다. 주3)

이처럼 인도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 토착 자본가 세력이 국가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데, 이들 지방 토착 자본가들은 계급적으로는 산업 부르주아들과 같은 자본가들이지만, 이들의 주요 경제 기반이 대토지와 거기에서 나오는 농업 생산물들이기 때문에 봉건제적 토지소유 관계에 의해 제약받고 있었다. 이런 차이점은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서 토지개혁을 추진하려던 독점자본가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비하르의 야다브 카스트도 이와 같은 소달구지 자본가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야다브들은 독점 자본가들의 도움으로 자본축적을 통해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산업화를 위해 봉건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철폐하려는 독점자본가들과 대립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자본가들의 분열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인도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위기가 찾아왔다.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목표로 했던 부르주아 지배계급은 봉건적인 토지 소유 관계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발목이 잡혔다. 그렇다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독점자본가들처럼, 자본축적이 고도화 되지 못했던 인도 독점자본가들이 봉건잔재들을 청산하고 강력한 토지개혁을 할 만한 정치적 힘도 없었다.

당연히 인도의 산업발전이 지체되었고 그에 따른 낮은 경제성장과 실업 그리고 인플레이션으로 1972년∼1973년 사이에 물가가 22퍼센트나 폭등했다. 1970년대 석유 파동과 세계 경제 공황이 인도 인민들의 삶을 더욱 더 옥죄였다.

견디다 못한 인도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파업과 대중시위를 하였다. 1974년 3월 18일에는 비하르 지역의 학생들이 대중시위를 하다가 27명이 죽었다. 이는 그 동안 참아왔던 대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학생들의 희생은 인도 전체 인민들을 반정부 투쟁으로 이끌었다. 5월에는 철도 노동자가 총파업을 하였고 수많은 파업들과 시위들이 일어났다.

이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1975년 6월 12일 알라하바드(Allahabad) 고등법원이 인디라 간디 수상의 부정선거를 인정하여 의원직 박탈을 선고했다. 인디라 간디 수상은 당장에 야당과 여론으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았다. 또한 그 다음날인 6월 13일에 치러진 구자라트 주정부 선거에서 국민회의당이 패배하여 인디라 간디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었다.

야당은 인디라 간디의 즉각 사임과 내각 해산, 그리고 즉시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는 대법원의 확정판결 때까지 사임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선거부정 판결을 선고한 고등법원 신하(sinha) 재판관을 해임시켰다. 그때 당시 8개월 뒤인 1976년 3월에 원래 총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으므로 대법원의 선고가 있을 때까지 수상직을 유지하겠다는 인디라 간디의 고집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더욱 격렬한 시위와 파업을 벌였고 야당과 중산층까지 정권퇴진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자 인디라 간디 수상은 6월 26일 아침에 기습적으로 국가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군은 악명 높은 국내질서유지보안법(The Maintenance Internal Security Act)으로 100명의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뒀다. 모든 종류의 집회결사의 자유가 불허됐고 언론사들은 감시와 출판금지를 당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불법 체포 감금된 사람이 100,000명이나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7월 1일 계엄통치 강령을 발표한다. 그 강령에는 모두 21개의 강령과 계엄통치의 목표가 제시되어 있었다. 이 강령의 핵심 내용은 ‘빈곤퇴치(garibi hatao)'였다. 21개 강령에서는 빈곤퇴치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하고 세금을 줄이겠다고 하고 있다. 토지소유상한제 같은 혁신적인 토지개혁 조치들도 강령에 포함됐다.

이와 같은 인디라 간디의 계엄통치 강령에는 불균등하게 자본주의가 발전한 인도에서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려는 독점자본가 계급의 의지가 반영돼 있었다. 이에 대해서 여전히 봉건주의적인 생산관계에 의존하는 소달구지 자본가들은 ‘토지개혁’이라는 이야기에 경기를 하듯 격렬하게 반(反)인디라 간디 투쟁에 나섰다. 이때부터 인도 자본가계급은 누가 적군이고 아군인지도 모르는 뒤죽박죽된 상황에서 서로 뒤섞여 혼란과 분열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여타 후진계급(OBC)의 영웅, 랄루 쁘라사드 야다브


독점자본가들과 소달구지 자본가들의 진흙탕 싸움에 혼란에 빠진 것은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인민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달구지 자본가들이 독점자본가들과 대립하고 싸우는 것은 토지개혁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인데도, 대중들은 소달구지 자본가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싸운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교육수준이 낮은 일반 대중들은 독점자본가들과 결탁한 국민회의당에 맞서 싸워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그들의 삶이 구원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국민회의당’, ‘반부패’ 구호로 유명한 정치인이 된 사람이 ‘자야쁘라까쉬 나라얀(Jayaprakash Narayan)이다. 그는 ‘JP’라고도 알려졌는데, 비하르 지역을 중심으로 ‘반부패’, ‘반국민회의당’ 운동은 ‘JP운동’으로 발전되어 인도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인도에서는 공산당조차 국민회의당을 대놓고 반대투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회의당의 지배체제는 전국적으로 견고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맞서는 저항도 전국적이었다.

‘JP운동’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자 중소상인과 소자본가들, 그리고 극우 힌두단체들(the Bharatiya Jana Sangh[BJS]; the Rashtriya Swayamsevak Sangh[RSS])주4)이 JP운동을 지지했고 이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자야쁘라까쉬 나라얀(JP)은 이념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트로츠키처럼 “총체적 혁명(Sampooran Kranti)" 노선을 따랐다.

그는 정교한 당건설이나 조직 강령 없이 대책 없는 ‘혁명’ 구호만 외칠 뿐이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있던 대중들은 혁명적 구호만 난무하는 JP운동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중들은 JP운동의 숨은 이면에는 극우 힌두세력이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우유나 짜는 야다브 카스트인 랄루도 이런 JP운동에 영향을 받으며 이에 열광하면서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1975년 비상계엄령 때 국내질서유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이후 열성적으로 JP운동에 참여하던 랄루는 1977년에 JP가 창당한 자나타 달 소속으로 연방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랄루는 정치인으로서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여타 후진 계급 출신의 랄루가 1990년에 비하르 주지사가 되자 그의 정치적 성공이 주목받았다. 특히 비하르에 사는 하층 카스트들, 특히 야다브들이 열성적으로 그에게 보내는 압도적인 지지와 랄루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는 여론을 뜨겁게 하였다.

한편 랄루와 야다브 카스트들의 독주에 반대하여 자나타 달에서 탈당한 사람들이 사마타(Samata)당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상층 카스트 중심의 친힌두 우익 성향을 갖고 있는 지역정당이다. 이 당의 지도자인 조지 페르난데스(George Fernandes)와 니티쉬 쿠마르(Nitish Kumar)가 1995년 5월 랄루를 가축사료기금 부정사용으로 고발함에 따라 랄루가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야다브 정권의 성격과 그 몰락의 정치경제학적 함의


랄루가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여타 후진 계급과 하층 카스트들의 강력한 정치개혁 요구와 부정부패를 일삼는 지배세력을 교체하려는 대중들의 열망이 작용하였다. 랄루는 이런 대중들의 기대감을 이용하여 그 자신이 여타 후진 계급에 속하는 야다브임을 내세워 하층 카스트들의 권리와 삶을 발전시키려는 정치 지도자인 것처럼 대중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면서 자본가계급에게만 그 대부분의 혜택이 돌아갔던 정부 지원금 일부를 여타 후진 계급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야다브 카스트가 독점하게 함으로써 비하르에서 오랫동안 랄루 정권을 유지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불법이었다. 비하르의 인민들은 처음에는 자신들도 야다브처럼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실제 삶은 나아지지도 않고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 속에 절망하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비하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던 야다브 정권이 몰락한데는 이와 같은 반(反)야다브 정서가 비하르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1970년대 이후 하층 카스트를 위하는 척하며 지방 정부 권력을 잡고 큰소리치던 지방의 소달구지 자본가들 역시 인민 대중을 기만하고 속인 것은 독점자본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인도 정치에서 하층 카스트들을 위한다는 모든 정치담론들은 사실은 하층 카스트끼리 분열과 갈등을 촉발시켜 그들의 사회변혁을 위한 혁명적 동력을 소진시켰다고 본다.

비하르의 사례를 보더라도, 1970년대 인도 전체를 뒤흔들 만큼의 하층 카스트들의 활발한 정치적 동력이 하층 카스트들의 권리 증진을 내세우며 집권했던 지난 30년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독점자본가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극우 힌두민족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BJP)과 사마타당(통합)이 연합하여 주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만약에 내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이 승리하면 비하르는 이념적으로는 극우 힌두민족주의 세력에게, 정치경제적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 장악될 것이다.

이런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면, 인도에서 독점자본주의 체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끝>

미주1) V. Krishna, "Fodder Scam, Lalu and the conviction, Economy and Political Weekly, Vol XLVⅢN NO43, October 26, 2013, 12쪽∼14쪽)

미주2) 자나타(Janata) 정부(1977년-79년)는 대법관 ‘만달(Mandal)’을 임명하여 하층 카스트들을 위한 보고서를 만들게 하였다. 이 ‘만달위원회(Mandal Commission)가 제출한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 달리트(Dalit), 지정부족민(Scheduled Tribe)들에게 공무원 임용의 22.5퍼센트를 할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에게 교육기관들의 입학정원을 할당하는 사회적 보상 정책을 권고했다. 그러나 자나타 정부의 만달 보고서는 잊혔고 10년이 흘렀다.

1989년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했다. 다시 총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인도국민당 대표인 라지브 간디가 기득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146석을 얻은 민족전선(The National Front)이 인도국민당(BJP 86석)과 좌파 정당들(52석)의 지지를 받아 겨우 중앙정부 구성에 성공했다. 극우부터 좌파까지 이념이 뒤죽박죽 섞인 민족전선 정부는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잠자고 있던 ‘만달 보고서’를 깨웠다. 그러면서 한발 더 나아가, 공무원 임용 할당률을 27퍼센트 더 늘려 전체 공무원 일자리의 49.5퍼센트를 하층 카스트에게 할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층 카스트들을 위한 차별적 보상 정책은 억압받고 가난한 하층 카스트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명목상 하층 카스트이지만 실제로는 새롭게 부상한 지배적인 신흥 하층 카스트들을 위한 특혜 정책이었다. 따라서 만달 보고서는 1990년 10월 1일 대법원의 합법 판결로 실시되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 상층 카스트들의 반발이 심했고 이런 정서는 극우 힌두민족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급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카스트 간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미주3) 펀잡의 자트시크(Jat Sikhs)들이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녹색혁명’ 덕분이었다.

미주4) 인도 독점자본주의 발전과 극우 힌두민족주의(Hindutva) -2002년 구자라트(Gujarat)대학살의 진실(이병진, 노동자정치신문, 2012년 5월)을 참고하라. 이 글에서는 인도에서 극우 힌두민족주의 세력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성장하게 됐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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