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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3호] 1830~1848 혁명 - 노동자투쟁의 패배와 새로운 혁명의 출발!! - 혁명사 기획(2)
노정협   2006-12-29 16:20:32, 조회:1,972, 추천:152
19세기는 혁명의 시기였다. 1세기 동안 혁명과 반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상대적으로 짧은 국면에서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반적으로 일정한 경향성을 띠면서 합법칙적인 역사 발전의 경로를 밟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곧 자본주의 체제의 완성이었다. 1789년부터 1799년에 이르기까지 10년간의 대혁명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시켰지만, 당시 생산력의 발전 수준은 자본주의 체제의 완성을 가져오기에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투쟁은 잠자고 있는 활화산처럼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시적으로 봉건주의 체제의 구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역사발전의 물결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구세력의 복귀는 오히려 자본가계급의 본격적인 정치세력으로의 등장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되었을 뿐이다.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체제는 확고히 뿌리내렸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이 자신들의 정치권력 장악을 위해서 동원했던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1830 7월 혁명과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1789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은 끊임없는 전쟁을 겪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연일 승전보를 울리던 프랑스 군대 역시 1815년 대패하게 된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호시탐탐 정권찬탈의 기회를 엿보던 구체제의 기득권 세력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새롭게 복귀한 봉건 왕조세력은 아무런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봉건귀족들에게 예전만큼의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1824년에는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패전에 따른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2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증대되었으나 그는 그 불만에 비례하여 더욱 반동적인 정책을 강화하였다.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대토지 봉건귀족들은 빼앗겼던 토지를 되찾으려 하였으나 부르주아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빼앗겼던 재산을 보상받을 수 있는 보상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반정부 세력이 다수를 점하고 이 법안이 부결되자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급기야 1830년 7월 25일 ‘7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자격의 제한(토지세를 기준으로 선거권 부여, 선거권자 수가 10만 명에서 2500명으로 축소. 이는 곧 토지 귀족만이 선거권을 지니는 것을 의미) 등이었다. 이에 부르주아 세력을 포함한 전체 인민은 격분하였으며 그 이튿날 파리 곳곳에서는 이들에 의해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영광의 3일간’의 시작이었다. 여기저기서 3만 명의 시민, 학생, 병사들과 정규군대간의 시가전이 전개되었고, 정부측 군대의 사상자가 늘어갔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서 29일 민중은 왕궁으로 진격하였으며, 이에 놀란 샤를 10세는 7월 칙령의 철회와 내각교체라는 타협안을 내놓았으나 시위대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부르주아와 노동자 민중은 더 이상 구체제의 왕조의 존속을 허락하지 않았다. 8월 7일 하원은 루이 필립을 새로운 왕으로 앉혔으며 그는 새로운 헌장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자본가계급의 국가는 아니었다. 새롭게 들어선 왕정은 은행, 증권거래소 등 고리대금업을 경영하는 자본가계급의 특정분파인 금융귀족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는 또 다른 혁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산업부르주아들은 특정 자본가 분파의 이해가 아닌, 전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권을 요구하는 투쟁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투쟁을 위하여 또다시 노동자계급의 힘을 동원하게 된다. 1830년 7월 왕정은 곧 1848년 혁명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7월 혁명의 결과로 각국에서 혁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831년에 벨기에가 독립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832년 영국에서는 제1차 선거법 개정이라는 혁명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자기 집을 가지고 10파운드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농촌에서도 부유한 농민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등 여전히 재산 수준에 따른 차별을 두었고 이는 부르주아지에게만 승리를 가져다 준 결과를 낳았다. 지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곡물법 반대 투쟁에서 함께 했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은 선거법 개정을 두고 갈라졌다.

부르주아 계급은 1차 선거법개정에 안주하려했으나 노동자계급은 더 나아가서 2, 3차 선거법개정 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차티스트 운동이다.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자본가계급의 품안에 안주하지 않고 1836~37년에 런던노동자협회를 결성하는 등 독자적인 투쟁을 전개하였고 1837년 초에는 런던노동자협회의 지도자였던 러벗 등이 ‘인민헌장’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는 1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하원에 제출하였으나 더 이상 정치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이용할 이유가 사라진 자본가국가의 하원으로부터 거부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러벗 등이 체포되고 이들의 파업결의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고 결국 9월에 해산되었다. 이후 오코너가 1842년에 다시 325만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를 제출하고 완전선거권동맹을 결성하였으나 이 역시 거부되었다. 이러한 청원식의 소극적인 운동방식은 당시의 차티스트 운동에 소부르주아 세력이 함께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째 청원이 거부되자 노동자계급은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급진적 소부르주아는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적대시했고, ‘헌장’이라는 용어 자체의 폐기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차티스트 운동은 소부르주아 성격을 벗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투쟁으로 나아갔다. 노동자계급은 선거법 개정과 함께 10시간 노동법, 공정한 임금, 단결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 노동자계급적 성격을 띠자 자본가계급은 더욱 광폭하게 이 투쟁을 탄압했다. 차티스트가 지도하던 파업투쟁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후에 1848년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차티스트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으나 자본가 정부는 25만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하였고, 운동은 종결되었다. 비록 차티스트 운동은 패배하였지만 이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권력에 대항하여 최초로 독자적인 정치적 요구를 걸고 투쟁한 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차티스트 운동은 패배하였지만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위대한 일보 전진을 할 수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1845년에서 1846년 사이에 전유럽을 덮친 감자고조병으로 인한 흉작으로 노동자 민중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노동자 민중은 빵을 요구했으나 금융자본가들은 오히려 이들을 폭도로 몰아 처형했다. 같은 시기에 상대적으로 자본주의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는 전면적인 공황이 시작되었다. 공황은 프랑스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던 부르주아들이 국내에 들어왔고, 자본가계급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빈손으로 거리로 쫓겨났다.

혁명의 기운은 184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각지에서 과중한 세금의 폐지와 선거 개혁, 일자리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1830년 7월 왕정과 기조(Guizot) 내각은 이러한 요구를 무시했다.(기조는 선거 개혁의 요구에 “부자가 되라. 그러면 당신들도 투표자가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오히려 1848년 1월 19일로 예정된 집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집회 및 시위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2월 22일 대규모 집회 투쟁이 전개되었고 평화적인 시위는 공권력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노동자 민중은 총으로 무장을 한 채 투쟁에 나섰다.

거리 곳곳에서 무장한 시위대와 공권력이 충돌하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조직되었던 부르주아의 군대인 국민 방위대의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루이 필립 국왕은 곧 기조 수상을 파면한다는 발표를 하였으나 노동자 민중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결국 2월 24일 격렬한 3일 간의 전투 끝에 루이 필립 국왕이 퇴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함에 따라 1830년 7월 왕정은 종말을 고하고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임시 정부에는 2월 혁명에 참여했던 모든 정파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독립적이고 공식적인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임시 정부는 대부분 부르주아가 차지하였다.

그러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는 즉각적인 공화정 선포에 주저하였다. 이에 노동자계급의 대표는 2시간 이내에 공화정을 선포하지 않으면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리 시청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임시정부에 경고하였다. 결국 자본가계급은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부르주아 공화정은 결정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해 쟁취되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공화정의 부르주아 성격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노동자계급은 생계의 보장과 모든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2만 명의 노동자가 다시 투쟁에 나서자 그때서야 임시정부는 특별상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에는 아무런 예산도 배정되지 않았고, 실권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이 특별위원회를 두고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별도의 노동부! 그러나 재정, 상업, 공공사업의 부처들, 이것들이야말로 부르주아적 노동부가 아닌가? 그런데 이들 옆에 프롤레타리아 노동부가 있다면, 그것은 무능한 부처, 헛된 소망의 부처, 뤽상부르 위원회(당시 특별위원회가 있었던 장소가 뤽상부르였기 때문에 특별상임원회가 불린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한편 임시정부를 장악한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해갔다. 더 이상 혁명의 전진은 이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장악한 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연이은 혁명과 전쟁으로 바닥이 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취한 정책은 불과 며칠 전에 그들이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던 금융귀족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과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자본가계급의 임시정부를 위해 새로운 세금의 희생양이 된 것은 농민들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직접적인 농민들의 경제적 피해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의 동맹을 교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들은 파리의 노동자계급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들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기존의 국민방위군만으로는 노동자계급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기동대를 창설하여 공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모든 요구가 묵살당한 노동자계급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일자리를 잃은 10만의 노동자들을 국민작업장으로 몰아넣었다. 저임금을 받고 하루 종일 비생산적이고 단순한 노무작업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빈민의 바스띠유’라고 불린 영국의 강제노역장과 같았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는 임시정부의 자본가계급은 곧 자신들의 본질을 드러내었다. 국민의회는 노동자계급의 대표자였던 루이 블랑과 알베르를 제명하고 별도의 노동부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부결시켰다.
이처럼 1848년의 2월 혁명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잔인한 혁명이었다. 혁명의 온전한 수혜자는 자본가계급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피를 수혈 받은 것은 자본가계급의 공화국이었다.

노동자 민중의 요구였던 공화정의 성립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의 온전한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이 모든 부르주아와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하는 본격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계급투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1848 6월 투쟁

2월 혁명의 부르주아적 한계가 분명해질수록, 자본가계급이 본질을 드러낼수록, 노동자계급의 분노도 커져갔다. 급기야 5월 15일 노동자계급은 국민의회로 몰려 들어가 ‘혁명의 지속’과 ‘이탈리아, 독일 혁명 운동의 지지’라는 구호 아래 빵과 일자리, 노동부를 창설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노동자들은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투쟁은 곧 진압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민의회는 집회를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거추장스러운 옷마저 벗어버렸다. 임시정부는 6월 21일 모든 미혼 노동자들을 국민작업장에서 강제 추방하거나 군에 입대시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 했다.

급기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파리 시내에는 400개의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6월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6월 투쟁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두 계급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대전투”였다. 노동자계급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자본가계급의 정규 군대에 맞서 5일 동안 처절하게 투쟁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자본가정부는 3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학살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독일의 노동자 민중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독일의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적 요구를 건 투쟁에도 함께하지 않고 노동자계급과 합의한 공동의 강령(사상과 결사의 자유, 남자의 보통 평등선거제, 상비군의 폐지와 민병대 설치, 누진 소득세, 배심재판, 의무교육제, 노동관계의 개혁, 의회 정치의 실시 등)과 모든 요구의 전제조건이었던 독일통일 요구마저도 저버렸다. 결국 독일의 부르주아도 봉건세력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6월 투쟁과 독일 투쟁의 패배로 전 유럽에 반동의 물결이 찾아왔다. 그러나 패배를 겪은 노동자계급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봉건제 타도! 절대군주 타도!’라는 과거의 구호는 사라졌다. ‘자본주의 철폐! 자본가계급 타도!’라는 붉은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했다!!

1848 혁명의 특징

우선, 혁명의 국제주의 성격을 들 수 있다.
1848 혁명은 프랑스 일국만의 혁명이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또한 세계혁명의 성격을 띠었지만 그것은 혁명의 근원지였던 프랑스에 의해서 전쟁이라는 형태로 주도된 혁명이었다면 1848년 혁명의 국제주의 성격은 달랐다. 프랑스 혁명에 자극받은 각국에서 자발적인 투쟁들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며칠 만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국가 정부가 무너졌다. 비록 프랑스 혁명의 실패 후, (조직적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무정부적이고 순전히 자발적인 투쟁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실패가 예견되었지만) 18개월 만에 거의 전복됐던 거의 대다수의 국가에서 구체제들은 모두 복귀했지만, 이 또한 일국 내에서의 혁명의 패배가 곧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더 이상 고유한 일국내의 혁명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을 뛰어넘는 연대와 공동투쟁이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력화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초반에는 서유럽의 각국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영국의 오언,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분노했지만 그 해결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의 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철폐할 유일하게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을 보지 못하고 이들을 단지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여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모순을 철폐하기 위한 계획에는 자본가계급의 자본이 필요했다. 계급투쟁 대신에 평화적인 방법을 택했던 이들은 선량한 자본가계급에게 재정을 구걸했으나,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한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비웃음만 샀을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 모순의 근본원인을 일부 악덕한 자본가로부터 찾으려했던 이들의 공상적 사회주의 계획은 당연히 실패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모순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계급투쟁을 끌어낸 과학적 사회주의가 등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창시자였다. 이들에 의해서 사회주의는 그 공상적 허울을 벗고 노동자계급 투쟁의 무기로 작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과학적 사회주의 세력이 1848년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했으며, 노동자계급의 전진과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도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 1848년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유럽 전체로 번진 혁명으로 각국의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이 급박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는 후에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낳는 기폭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본가계급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투쟁을 들 수 있다.
프랑스에서 6월 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전투가 전개되고, 반동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상황을 두고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단히 결정적인 투쟁이 발발하였다는 것, 이 투쟁이 하나의 길고 변화무쌍한 혁명 기간에 끝까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투쟁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본가계급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투쟁!! 이것은 1848년 혁명이 노동자계급에게 가져다 준 유일한 선물이기도 하다. 1848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자본주의의 발전은 곧 조직된 노동자계급 운동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 출발점은 바로 6월 투쟁이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품속을 박차고 나와 독자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혁명의 과제가 등장했다. 소수의 지배가 아닌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다수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부르주아 혁명의 환상에서 깨어난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였다!!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곧 새로운 혁명의 시작인 것이다!!

6월 투사들이 피에 젖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삼색기가 유럽 혁명의 깃발인 붉은 기로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외친다. “(부르주아)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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