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2)-각국의 사민주의 정당비판]
프랑스, 점진적인 신자유주의 길
1. 공화국 연대-프랑스의 국가주의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예술, 패션, 문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에서 혁명과 노동자의 전투성을 떠올린다. 혁명과 노동자의 전투성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의 편협한 운동권적 생각 탓인가? 과거의 혁명적 영광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오늘날의 척박한 혁명의 환경에 대한 불만과 탈출욕구의 결과인가? 아니다! 혁명은 프랑스의 과거의 이름이나 기록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의 사고구조와 행동양식을 관통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이다! 프랑스 혁명이 없는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공화국 정신이나 공화국 연대라고 집약할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총성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격적 예속을 타파한 자리에 자유․평등․박애의 글자를 새겼다. 신분적 위계질서와 억압과 차별은 사라지고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사회구성원들은 통합되었다. 그러나 자유․평등․박애는 부르주아적 자유․부르주아적 평등․부르주아적 박애였다. 이것은 1848년 2월 혁명과 6월 노동자 봉기에서 잔인한 살육과 피의 언어로 사회의 전면에 드러났다.
1848년 2월 혁명은 복고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복원시켰다. 그리고 남성보통선거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권리’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노동자의 독자적인 계급적 요구를 공화국에 강요했다. (남한에서 1987년 6월 부르주아 민주화 투쟁으로 직선제라는 국민주권을 얻어내자 그 열린 공간을 치고 나와 6월 민주화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고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총파업의 언어로 남한 사회 한복판에 깊이 새긴 1987년 노동자 7,8,9투쟁을 생각해 보라!)
2월 혁명의 실질적 추진력은 노동자의 총구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2월 혁명의 과실은 부르주아지들이 독차지했다. 노동자는 몸만 대주고 얻은 것이 없었다. 달랑 장관 자리 하나만이 노동자에 대한 몫으로 루이블랑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사실 1789년 대혁명의 실질적 힘도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파리의 수공업자와 노동자 즉, 사회의 하층계급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 힘과 경제적 힘을 가진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이데올로그의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는 2월 혁명의 실질적 주역으로서, 공화국 시민으로서, 노동자의 권리를 노동자의 힘의 과시를 통하여 부르주아지에게 강요했다. 노동자의 힘의 과시에 놀란 부르주아지들은 반동적 세력과 손잡고 노동자의 요구를 묵살하고 소부르주아지와 룸펜프롤레타리아를 이용하여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작정했다. 노동자는 봉기했다! 봉기는 무참하게 진압됐다. 노동자의 당이 없고 전국적인 질서를 갖추지 못하고 소부르주아지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노동자의 봉기는 고립됐고 부르주아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계급들의 연합에 의하여 처참하게 짓밟혔다. 파리의 산하는 피로 얼룩졌고 파리의 6월은 노동자의 피로 기록됐다.
1848년 6월은 1871년 파리꼬뮨으로 부활한다. 1848년 6월과 1871년 파리꼬뮨은 프랑스 지배세력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노동자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적 비밀이 폭로되고 부르주아 사회체제의 위협에 놀란 프랑스 지배계급은 사회적 권리의 인정․사회적 연대를 통하여 노동자를 부르주아 사회체제에 통합시키려고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박애로 표현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정책을 사회적 권리로 확대하고 이 사회적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법적․정책적으로 옹호하고 집행함으로써 부르주아체제의 안정과 국민통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대하는 것, 국가-공화국-를 통하여 사회적 권리를 집행하고 확장하는 것이 공화국 정신이자 공화국 연대로써 프랑스 사회에 정착하였다. 프랑스 사회당은 이 공화국 연대를 확장하고 실현하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보았다. 이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 즉, 보통선거제도를 핵심 매개고리로 한 국가의 민주화와 노동자 권리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독일 사민당의 노선과 일치한다.
이 공화국 정신, 공화국 연대로 표현되는 프랑스 국가주의는 대외적으로는 ‘애국주의’ 사상으로 나타나서 제1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하게 된다. 이 후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이후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1970년대의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립정권건설의 기초가 된 국유화․계획화의 공동이데올로기이자 공동요구안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1848년 6월과 1871년 파리꼬뮨의 전통은 쥘 게드가 중심이 되어 창당한 프랑스 노동자 당과 프랑스 공산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무정부주의자와의 통합, 공화주의적 사회당과의 통합이라는 명확한 사상적 통일성과 노동자의 정치적 독자성의 상실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파시즘 노동자 전선의 형성을 통하여 노동자혁명의 전망을 창출하지 않고, 스탈린주의 영향 아래서 인민전선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전선의 우산 아래서 세력의 보존과 확장에 안주하여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치질서의 구축과 노동자의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설에 실패한다. 이후 68혁명의 영향-더 많은 민주주의․개인주의․문화적 민주주의-과 소련의 철의 장막이 찢겨지고 드러난 관료주의에 대한 반발을 기초로 노동자 계급의 독재를 폐기하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른바 유로코뮤니즘이다!
사회당과 실질적인 사상적 차이가 사라진 공산당은 1970년대 사회당과의 동거정부를 거치면서 당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10% 정도의 득표를 하다가 2002년 선거에서는 3%의 득표에 그치는 무기력한 당으로 전락하였다.
2. 프랑스는 다르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
1971년 에피네 전당대회를 거쳐서 분열되어 있던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들은 통합되고 미테랑은 사회당의 권력을 장악한다.
“미테랑에 의한 사회당의 권력 장악은 기존의 사회주의와의 단절을 기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미테랑은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목표가 권력 장악임을 강력히 천명한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이라는 목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제5공화국의 제도들을 수용하게 된다. 이제 사회당은 권력의 장악과 행사를 위한 도구로서 의미를 가지면서 당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었던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게 된다.”<김수행 안삼환 정병기 홍태영 공저,『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1981년 미테랑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1973년을 기점으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든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은 사회당의 전반적인 노선의 변화를 강제한다. 1982년 사회당 정부는 임금과 가격의 동결 정책을 수립한다. 1983년 미테랑은 정부의 과도한 개입주의를 비판하고 정책을 전환한다. 국유화는 이제 사회주의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된다.
“1983년은 조스팽의 ‘제3의 길’이 태동된 시기로서 ‘제3의 길’ 이념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미테랑은 “중간적 길”이 “사회전체의 조화를 복원하기 위해” 가능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경쟁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을 재건”하기 위해 공공부문과 사적부문의 공존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혼합경제사회”의 형성을 주장했다”<『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미테랑의 후계자인 죠스팽은 미테랑의 노선을 계승한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특히 실업률이 10%에 도달하게 되자 죠스팽은 신자유주의적 노선과 사회적 안전망 또는 공화주의적 연대를 결합한 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정당화의 깃발을 명확하게 꽂는다.
기업의 사회적 부담금을 낮추는 세금조치, 임금억제 정책, 민영화의 지속, 취업장려금의 신설을 추진한다. 이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고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통하여 사회적 통합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1988년에 제정된 최후의 사회적 안전망이라 불리는 최소적응수단, 죠스팽에 의하여 추진된 포괄적 의료보험, 긴급구조금 지원과 반소외법이 그것이다.
중도우파인 시락정부가 강력하고 빠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면 사회당과 죠스팽은 상대적으로 점진적인 형태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회적 안전망을 함께 마련하여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 점은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연대 전통이 프랑스 정치, 사회, 문화에 그만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당의 정책은 계급적 태도와 실효성에서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실업문제 해결의 태도와 결과를 보자.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의 유연화와 더불어 실행되었다. 그 결과 비정규직이 확대되고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실질적으로 임금이 악화되었다. 실업률 개선의 효과는 없었다.
사회당은 2002년 대선에서 3위를 기록하며 권좌에서 떨어졌다. 국민전선의 극우파 르팽은 2위를 차지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국민전선 지지층의 50% 가량을 노동자와 룸펜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는 것을 볼 때 빈부격차나 실업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노동자와 실업자의 불만이 얼마나 큰 지, 사회당의 정책적 실효성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를 기본노선으로 인정하고 추진하되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안전망 조치 즉, 사회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함께 추진하였다. 그러나 자본의 세계화와 경쟁격화, 이윤율 하락의 위기 지속과 높은 실업률, 유럽통합은 사회당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을 위한 계급적 관계형성과 재원마련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당은 자본의 현실을 인정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전략적으로 추구하면서 상황에 맞게 전술적으로 사회적 안전망, 사회적 통합조치를 취하는 정도에 국한되고 말 것이다.
3. 노동자 행동의 고양에 맞추어 새로운 정치 지도력을 만들자.
1995년 겨울 철도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고 파리 지하철, 우체국, 전기-가스, 교원노조가 참가한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실업노동자들의 파업은 3주 이상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교육개혁에 대한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쥐페정부는 강력한 노동자의 파업과 사회적 분위기에 밀려서 공공부문 구조조정에서 작전상 후퇴했다. 당시 총파업 투쟁은 노조 주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목적의식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던 성과였다.(당시 정치․사회단체들은 ‘Group of Ten'이라는 공투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시락 정권과 프랑스 자본은 구조조정을 쉬지 않고 추진할 것이다. 노동자의 불만은 쌓이고 저항은 강해질 것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투표에는 참가하지만 정당에는 가입하지 않는 전통이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서 강하다. 무정부주의, 아나코 생디칼리즘(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전통이 강하다, 노조의 조직률이 낮고 여러 노조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은 노조나 노동자의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을 높이고 노동자의 대중투쟁-전투적 조합주의-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 국민파 르팽의 급부상과 트로츠키주의자 라기이에의 5% 연속 2회 득표는 실업자나 노동자, 파산하는 소부르주아들이 기성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 예를 들면 소위 극좌와 극우를 선택할 가능성도 넓히고 있다.
노동자 해방을 추구하는 활동가, 선진 노동자, 조직은 단호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애국주의의 프랑스판 이름인 ‘공화주의적 연대’를 넘어서자. 1848년 2월의 전통이 아닌 1848년 6월 봉기의 전통과 1871년 파리꼬뮨의 노동자 혁명의 전통을 되살리자. 점증하는 노동자의 고통과 실업자, 격화될 노동자의 투쟁에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제공하자. 파산하는 소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힘과 대안이 되어 소부르주아 하층의 지지를 획득하고 파시즘의 발흥을 저지하자. 자본주의 유럽합중국과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서 사회적 권리의 유럽화라는 개량주의 정치를 거부하자. 노동자가 해방된 유럽과 노동자가 해방된 노동자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프랑스의 노동자와 유럽의 노동자, 전세계 노동자는 노동자 단결의 깃발을 굳게 잡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