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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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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08:46:25, 조회:3,039, 추천: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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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지난 2월 15일 일본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이 개최한 정치강좌인 홍고문화포럼노동자학교(약칭, HOWS)에서 발표한 강연 글이다. 두 번에 걸쳐서 나눠서 싣는다.>
한국노동운동 진로를 둘러싼 논쟁 1
――한국·일본·그리스를 연결시키는 길
1. 들어가며
한국노동자 계급운동의 변혁의 진로를 가지고 토론하자면, 역시 먼저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또 현재의 운동 상태를 낳은 과거, 그것도 가장 극적인 과거를 되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그리하여 과거로 되돌아가서 과거의 무엇이 현재를 낳았는지, 그리고 현재를 어떻게 극복해야 다시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한국의 노동자 계급 운동 그리고 변혁운동의 상태와 지반을 낳은 극적인 과거는 1980년대 말 동유럽 해체와 1991년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였습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사상적 혼란이 극심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의 상황과 조금은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사상운동> 홈페이지 소개 글을 보면, 일본에서는 이미 1960년대에 사상적 혼란이 시작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69년에 <활동가 집단 사상운동>이 출발하게 됐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1961년 일본 공산당 8회 당대회에서 기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일어났던 사상적 혼란, 실천적 동요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암튼 그 무렵부터 지금껏 일본 대중운동의 후퇴와 우경화라는 악조건 속에서 변혁적 원칙과 과학적 사상을 굳건하게 견지하고 계시는 일본의 동지들께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1960년대나 1970년대 시기는 사상적 혼란 자체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내전과 이후 들어선 박정희 군사파쇼의 탄압 아래서 변혁 운동 자체가 말살되고 변혁사상과 변혁운동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운동의 정신을 전태일 열사가 제공했다고 한다면, 1980년대 전두환 군사 파쇼에 맞서는 투쟁은 1980년 5.18 광주항쟁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5월 광주는 1980년대 내내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에 끊이지 않는 자양분을 제공했습니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한국에서도 암암리에 맑스, 레닌의 원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한국판 브나로드(Vnarod) 운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학생들은 수천 명씩 현장투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6월 전두환 군사독재가 간선제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는 기도를 하자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내걸고 대대적인 항쟁이 전개됐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대중투쟁을 가라앉히고자 노태우를 내세워 기만적으로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 위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군대식 노동통제와 비인간적 모멸감 속에서 고통 받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1987년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한국의 변혁운동은 거대한 노동자 대중투쟁의 물결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변혁운동과 노동운동이 쇠퇴를 겪고 있던 상황과 달리, 한국의 변혁운동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쏘련이 붕괴하는 직전까지 불꽃처럼 타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 내부는 물론이고 각 현장마다 노동자 노래패와 율동패, 풍물패가 만들어지고, 노동자 야학(夜學) 운동이 전개됐습니다. 잔업, 특근으로 피로한 몸을 이끌고 노동자들은 열화와 같이 현장 학습 소모임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노동자 문화운동과 현장 학습 소모임을 통해 탄생한 선진 노동자들이 대중투쟁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중문학, 민중연극, 민중미술처럼 진보적인 문화예술이 생겨나고, 의과대학 학생들과 의사들은 민중의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본론>을 비롯해서 맑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출판 운동이 러시를 이루고 학계에서의 진보적인 연구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때에는 일본의 맑스레닌주의 저작들도 무척 많이 출판이 됐습니다. 이른바 지적, 사상적 불모지인 동토의 한국사회에서도 사회과학의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교양 계급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사람들이 모두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고조되는 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지식분자들의 주요 대오들이 사회주의 운동과 그 영향권 내로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사회 전반의 진보적인 열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항문화가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2. 우익 청산주의
19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 해서 전위조직들이 앞 다퉈 출범해서 노동자 투쟁에 점차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삼민동맹(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인노련(혹은 인민노련,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노동계급, 제파PD(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 등 전국적 조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전국화 된 조직들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들 말고 친북 성향으로 한층 더 혹독한 탄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NL파(민족해방파)는 전위정당 건설 운동을 뒤로 미루고 산개론(散開論)을 외치며 전국적으로 분산적으로 존재했지만, 이들이 통일운동과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하면서 전체 운동의 다수파를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노도(怒濤)처럼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던 변혁운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붕괴로 대혼란에 빠지고, 이어서 청산주의 물결이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던 비합전위정당 건설을 모색하던 조직들은 당시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타격을 입고, 핵심 지도부들 대다수가 감옥 안에서 이러한 대격변의 시기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사노맹 지도부들은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점에서 오랜 역사적 단절 상태를 벗어나 막 성장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국내외적인 청산주의 물결에 맥없이 휩쓸려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금방 왔다가 아쉽게 가고 마는 짧은 봄날처럼, 한국의 대중적인 변혁운동은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민족해방파(NL)는 동유럽과 쏘련 붕괴로 인한 충격을 범(汎) PD파처럼 받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사상적, 정치적 대혼란의 시기에 변혁운동에 앞장섰던 혁명 분자들, 조직들이 쏘련 해체 전후의 거대한 역사적 격동기를 마주하고, 어떤 감정, 인식,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쏘련 해체 이후에 필연적으로 합법주의, 청산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소장을 읽어 보면 본인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혁명가? 그것이 본인을 규탄할 용어가 될 수 있을까요? … 저는 혁명가란 사회 역사를 진보시키고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기 위한 역사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영광스런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내가 혁명가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이며 사회주의 혁명가인 것이 문제라고 말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본인을 감옥에 처넣어야 할 이유가 된단 말입니까? … 본인은 사회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건전한 상식이 선택하는 자랑스런 칭호입니다. 사실 오늘날처럼 현실이 사회주의 사회들이 급격한 변화의 와중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입니다. 이 급격한 사회주의 나라들의 변화를 사회주의의 위기라고 하고 새로운 모색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위기냐, 새로운 발전을 위한 진통이냐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둘 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사회주의 이념의 이상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 나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습니다. 저들 지배 세력이 물러서지 않는 한, 이 싸움은 끝이 없는 전쟁입니다. 머지않아 노동자 계급은 미래를 짊어지고 쓰레기, 기생충 같은 무리들을 쓸어낼 노동자 정당이라는 무기를 갖게 될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해방 투쟁은 더 한층 발전할 것임을 다시 한번 단언하는 바입니다. 1990년 3월 28일(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 남한 사회주의자들의 법정 선언, 윤철호, 오동렬 외 도서출판 일빛 1990)
당시 서른 살의 윤철호 씨가 한국 노태우 군사정권의 법정에서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 진지함과 용기는 지금 그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상관없이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쏘련 붕괴 직전의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윤철호 씨의 법정 최후진술은 마치 독일 파시즘의 법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쳤던 디미트로프의 최후진술처럼, 불굴의 용기로 가득 찬 감동적인 사회주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최후진술은 당시 진보적 노동자들, 학생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관심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윤철호 씨와 같은 <인노련>(혹은 인민노련) 조직사건으로 구속된 오동렬씨는 항소이유서에서 직접적으로 ‘5. 현존 사회주의 사회의 개혁과 위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묻고 여기에 대한 입장을 개진합니다.
현재 사회주의의 위기와 개혁은 세계 인류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개혁은 세계 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며, 세계 역사를 평화의 시대로 이끌고 있습니다. … 저는 지금부터 사회주의의 위기와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소감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갇힌 상황, 제한된 정보, 부족한 이론‧역량 때문에 이 문제를 올바로 평가하기에는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혁을 이끄는 당사자들은 그러한 위기가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파탄, 사회주의 이념의 몰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의 한계 혹은 과오라고 평가합니다. … 가령 10월 혁명에 모든 악의 근원이 있다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의 실험은 70년 만에 파탄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 (같은 책)
이처럼 당시 한국의 변혁 활동가들은 감옥에 갇혀서도 여전히 사회주의 신념을 움켜쥐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면서 권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들의 처절한 고투(苦鬪)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하지만 이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감옥이라는 제약된 공간 속에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그것도 경험과 연륜이 부족한 젊은 활동가들이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해체 과정에 대해 과학적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이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있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레닌정신으로의 복귀를 외치고 있지만, 사실은 흐루시초프가 반스탈린주의를 내걸고 수정주의 노선을 걸은 이래 수정주의 노선의 정점에 서 있는 반레닌주의 사상으로 판명이 됐습니다. 하긴 국제적으로도 유수한 공산당들조차도 페레스트로이카의 반사회주의적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당시 한국의 젊은 활동가들과 조직들이 분단과 반공주의가 가져온 한국의 지적, 정치적 풍토 속에서 그러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봅니다.
이들이 당시에 쏘련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창은 고르바초프를 위시로 한 수정주의 세력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들이 당시에 옥중에서 인용하는 책은 <사회주의 대개혁의 논리 -소련의 최고 이론가 23인이 밝히는 ‘인간적 민주사회주의’의 논리와 쟁점->(풀빛 출판사, 1990) 같은 책으로 ‘전 인류적 가치’, ‘신사고’ 따위의 고르바초프 진영의 수정주의 노선을 대변하는 책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문고’ 출판을 목표로 하는 제법 유명한 ‘돌베개’라는 출판사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1989년 4월 레닌 저서를 발행하면서 당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즘 신문, 방송에서는 소련의 뻬례스뜨로이까니, 중국의 4대 현대화 계획이니 하면서 공산권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이른바 ‘북방외교’의 기치를 높이 들고 문화 교류니 경제 교류니 각종 문제 간행물의 “해금” 조치니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다. … 좀 냉정했으면 좋겠다. 뻬례스뜨로이까(perestrika)라는 것은 재편(再編)이나 재건(再建) 또는 개혁을 뜻하는 말로서,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 전반의 운용 원칙을 재검토하겠다는 말이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서방의 자본, 기술을 들여오고 있지만 몇 십 년 안에 서방세계는 사회주의로부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중심을 찾아야 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는 색다른(?)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 세계의 이념적 토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한국어로 옮기면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도서출판 돌베개 초판 1989년 개정판 1992년)
맑스-레닌주의 기치를 내걸고 원전 번역 작업을 하면서 쏘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사회주의의 재편이나 재건을 위한 운동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쏘련 수정주의의 본성이 드러나고 쏘련이 이들로 인해 해체되어 버렸으니 당시에 이러한 출판사가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혁명가들의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은 고르바초프의 노선이 자본주의로 최종 투항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대로였고, 이 입장을 더욱 더 단순하게 밀고 나가 노선으로 정립해 나갔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라는 우리의 기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교조화를 토대로 한 스탈린주의와 일선을 긋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교조적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방의 사상으로부터 억압 이데올로기로 전화했으며, 대립물의 상호 전화의 법칙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문제, 다른 말로 해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스탈린주의와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되는 사회주의를 우리는 지향한다. …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는 먼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달성한 민주주의 수준을 따라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 숱한 왜곡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황광우,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 기획출판, 거름, 1993년)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성과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계급독재 지배를 본질로 하고 있음을 간과(看過)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완전 투항하였습니다. 이들은 현대 사회주의가 “그 숱한 왜곡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본주의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면서 전도된 인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쏘련 해체와 자본주의의 일시적 승리라는 역사적 격변에 압도당해서 그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이 달성한 성과들, 완전고용, 노동시간 단축, 무상체제, 민족분규 해결,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승리, 민족해방 투쟁의 지원과 승리 등등 인류 최대의 진보적 성과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성취라는 것도 사실은 쏘련 등 사회주의를 전망으로 해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한 결과물로 얻어진 성과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유럽과 쏘련 해체 이후에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민중의 성취물들을 모조리 앗아가려는 국제적 부르주아 공세가 그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이들의 전망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전면 거부하고 부르주아 체제 내에서 점진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축적해 가다보면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한국판 유로 꼬뮤니즘 노선으로 경도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위 글의 필자가 쓴 책의 8장의 제목은 바로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적 길’이었습니다.
이들의 정치노선의 전면적 우경화는 조직노선의 우경화를 낳게 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1991년 인민노련, 삼민동맹, 노동계급이 하나로 합쳐 한사노당(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하려 하지만 곧바로 안기부(현재 국정원)에 의해 침탈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이제 전위정당 노선을 전면 폐기하고 합법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굴욕적인 탄원서를 안기부에 제출하는 치욕적인 작태까지 연출합니다. 이것이 악명 높은 안기부 탄원서 사건입니다.
탄원서
1. 저희들은 92년 1월 17일 경찰당국이 발표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들로서, 본 사건으로 이미 구속된 주대환씨 등 4인의 석방과 본 사건에 대한 관계당국의 관대한 조치를 탄원합니다.
2. 저희들은 세간에 본 사건이 합법적인 진보정당에 대한 정부 당국의 비우호적 태도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3. 경찰당국에서는 본 사건이 합법적으로 등록된 ‘한국 노동당(가칭)’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에 해당되는 비합법조직,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에 대한 수사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사실은, 경찰당국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91년 7월 결성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는 91년 12월 조직원의 자발적 결의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것입니다. … 91년 12월 조직의 해산 이후, 이 조직의 성원들은 정부당국에 합법적으로 등록한 ‘한국 노동당(가칭)’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92년 2월부터는 91년 11월 18일 대통령께서 직접 그 대표자들을 면담하신 바 있는 ‘민중당’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4. 91년 11월 18일 대통령께서는 민중당 대표자들과의 면담자리에 “합법적인 진보정당운동을 보호, 육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
5. … 저희는 진보세력의 변화 중 관계당국에서 주목해야 할,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띠는 사건으로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의 자발적 해산을 꼽고자 합니다.
이 조직의 해산은 그간 노동운동 등의 정치적 그룹이 지향해 온 ‘비합법 전위조직노선’, 세칭 ‘지하조직노선’이 개명한 시대에 사는 일반 국민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으며, 이러한 노선으로는 이 사회의 발전에 궁극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6. 또한 ‘비합법 전위조직노선’의 폐기는 그간 진보세력 일각을 지배해 온 ‘폭력혁명노선’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됩니다. …
7. 저희들의 생각의 변화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모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세기적 대격변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국가로 알려져 왔던 사회주의 국가가 실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다름 아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주의권의 현실을 하나하나 목도하면서 저희들은 사회주의권에 대한 그간의 동경을 내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8. 비합법 전위조직으로서의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의 해산에서 합법정당으로서의 ‘민중당’으로의 합류에 이르는 과정은 저희들의 이런 사고의 전환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
9. 마지막으로 관계당국에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본 사건의 처리 방침이 4인의 구속자와 저희들 관련자들뿐이 아니라, 여전히 비합법 조직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의 운명을 규정할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이 사회의 건전한 발전 여하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입니다.
관계당국에서 현명한 결단을 내리신다면, 이는 구시대적인 비합법 조직 운동에 매달려있는 많은 진보세력을 합법정당으로 나오게 하는 물꼬를 트는 역사적 결정이 될 것입니다. … 다시 한 번 관대한 조처를 호소하며, 인사를 대신합니다.
1992. 2. 24
황광우 정광필 구인회 임영탁 최정식 이상민 윤영상 김성은 이영이 박병우
박용준 조근래 신지호 한승주 이상귀 조진태 안명균 유병진
세계 노동운동 역사상 이처럼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반성문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 악명 높은 탄원서는 한국 전위정당 운동의 최종적 몰락을 희비극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쏘련 붕괴가 가져온 후과(後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전위정당 세력들이 사상적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 변절과 투항이 줄을 잇는 순간에도 학생운동과 노동자 투쟁은 계속해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노/정/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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