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
20일 아침, 출발하기까지 차편을 구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투쟁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을 만나 동행한 건 참 행운이었다. 민주노동당사에서 상경 집중투쟁 39일째를 맞고 있는 경찰청 고용직공무원노동조합 동지들이 자신들의 투쟁 상황을 민주노총 대의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함께 떠났다. 추운 날씨에 연일 계속되는 집회에 지칠 만도 한데 두 동지들은 밝고 기운차 보였다.
이번 33차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핵심은 ‘사회적 교섭에 관한 건’을 가부 결정하는 데 있었다. 대회전부터 노동조합과 조합원들, 현장조직들이 사회적 교섭 안 상정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민주노총에 릴레이로 게시하고 있었다. 대회장에서도 사회적 교섭 건을 둘러싼 긴장은 계속 되었다. 정권이 2월 비정규직 법안 통과를 반드시 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는데도 노사정 참여를 논의 한다는 게 참 어이없지만 이 황당한 짓거리를 그만두게 하려면 조직된 힘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사회적 교섭 안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이 자리에서 어떤 조직적 행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여서 답답했다. 뒤늦게서야 이 건에 관한 사전논의 결과(표결 시 집단 퇴장한다)를 들을 수 있었는데 과연 그 정도의 부담을 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연맹 간담회가 늦어져 투쟁보고 대회는 참여하지 못했다.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자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의 “여러분들이 평생 정규직일 거라고 장담하지 마라, 비정규직 투쟁에 동참해서 함께 싸우지 않는다면 동지들의 고용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마지막 발언만 들을 수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재적대의원 785명 중 538명이 참여 하여 정기 대의원대회가 시작되었다. 회순통과 과정에서 현장에서 긴급 발의된 안건 상정 여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시작 되었다. “서울대병원지부 징계 철회와 서울대병원지부 운영규정 즉각 승인 건”과 “IT연맹(공공연맹을 탈퇴한 KT노조와 한국노총에서 나온 KTF노조가 만듦)승인 취소 및 가맹 불승인 건”, 이 두 가지는 지난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30명이 서명하여 긴급 발의 되었고,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지만 대회가 유회되면서 다루지 못했다. 의장은 한 회기에 상정, 폐기된 안건을 다시 다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의 입장이라며 안건을 재상정하려면 다시 형식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에서 발의한 안건을 집행단위에서 폐기 결정할 수 없으므로 위원장이 직권으로 안건 상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의장은 형식과 절차를 요구했고 과반수를 얻지 못해 안건은 자동 폐기되었다. 위원장은 국회에서도 안건이 회기 내에 다루어지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며 정당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합이 정한 규약과 규정은 다양한 입장과 의견들을 조율하고 결정하기 위한 최소 기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수호 위원장은 조합 내 첨예한 입장들을 공개하고 확산시켜 동의를 얻기 보다는 형식과 절차를 내세워 논의 자체를 봉쇄하고 말았다. 게다가 집행부에서 상정한 안건의 경우 유회되더라도 위원장 직권으로 얼마든지 다시 상정할 수 있다. 현장발의 안건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본격적인 안건심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은 전해투 교부금 미지급 건, 비정규조직 사업을 위한 50억 기금 건, 2월 총력투쟁 건 등이다.
전해투 교부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는 문제는 지난 대회에서도 제기되었을 때 “예산이 없어서 지급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전해투 예산 집행이 투명성과 구체성을 갖추지 못해 지급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답변을 들었다. 상호 공방과 참관하고 있던 전해투 의장의 발언을 종합하면 전해투는 총연맹이 요구하는 사업계획서, 예산서를 모두 제출했다. 결국 전해투 교부금 미지급 문제는 ‘영수증’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 결성 이전부터 자체적인 의결, 집행기구를 갖추고 연맹 내 일반 위원회와 달리 독자적인 활동을 벌여 온 전해투가 조직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유지하겠다는 반면, 연맹 내 여타 기구와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관장하고 통제하려는 총연맹의 의도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위원장은 전해투와 협의가 불충분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적절히 처리하겠다고 답변하면서 논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진 사업계획 안건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비정규직조직화 기금 50억 조성 건’이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최대 현안인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연맹에서 어느 만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는지, 일상적인 사업으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비정규직 투쟁이 아무런 예산의 구체정과 사업 내용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기금 조성에 집중된 것에 대해 대의원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일반 예산서에서는 오히려 비정규직 관련 예산이 감액되어 있는 상태였다. 50억 기금 조성에 반대하는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앞으로 현장 조합원들에게 어떤 동의 과정을 밟아 모금에 참여하게 할 것인지 난감하기만 했다.
“2005년 민주노총 비정규직 투쟁은 기금 조성에만 집중하고자 하는가”라는 의문은 이어진 ‘2월 총력투쟁’ 건 논의 과정에서 더욱 짙어졌다. 지난 대회에서 ‘2월 총파업’으로 수정 통과되었던 내용이 정세가 더 엄혹해진 상황에서 ‘총력투쟁’으로 제출된 것에 대해 위원장은 “법안 강행 처리 시 이미 결정한 총파업 당연히 들어간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연맹에서 제출한 안건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법안 강행 처리하지 않더라도 권리입법쟁취를 위해 하루 총파업에 들어간다”를 민주노총에서 결의해줄 것을 요청한 비정규직연대회의 제안은 표결에서 무참하게 거부당했다(399명 재석대의원 중 77명만 찬성).
새벽 3시 반이 넘은 시간에 ‘사회적 교섭’건을 다루게 되었다.
방송 카메라에 에둘러 싸인 상태에서 집행부는 이 안건이 ‘조건부 노사정 참여’를 검토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정회 요청과 재량권 행사임을 강조하며 회의를 강행하겠다는 의장의 발언이 되풀이 되었다. 정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하자는 기막힌 제안까지 나오는 지경이었다. 위원장은 산별대표자회의를 소집했고 회의를 속개 하여 ‘휴회’를 제안했지만 이미 의사정족수가 미달되는 상태여서 회의는 ‘유회’되었다. 위원장은 “다루지 못한 4호, 5호 안건을 직권으로 상정하여 임시대의원대회를 속개 하겠다”며 마무리 지었다. 시간은 새벽 5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이번 대의원대회에서 절차를 통과하여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려던 이수호 집행부의 계획은 관철되지 않았다. 그러나 2월 1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예고하면서 집행부는 조건부고 뭐고 노사정에 꼭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사회적 교섭’건이 단지 며칠 늦게 통과되는데 불과할 것인지, 아예 폐기처분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인지는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고 비정규직 투쟁과 연대하여 총파업투쟁을 벌이고자 하는 동지들의 몫이다.
현장에서 발의한 안건은 폐기 당했다. 대의원들이 제출한 수정안은 모두 부결되었다. 비정규직연대회의에서 제안한 ‘2월 하루 총파업’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절차와 형식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데 같은 방식으로 여유를 부리기에는 수적 열세가 너무 크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 행위들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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